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진한 밤색의 가죽재킷에 형광빛이 도는 노란 티셔츠를 입은 아빠는 한 손으로 딸의 손을 잡고, 또 다른 손에는 아들을 안은 채 무표정하게 산책을 하고 있다. 아빠의 티셔츠가 쭉 늘어지도록 손에 꼭 쥔 아들은 자신을 지켜보는 관객들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본다. 낙타색, 연청색, 연회색 천을 꿰매어 낡은 느낌의 워싱을 넣은 아빠의 청바지는 ‘깔맞춤’ 코디보단 ‘양말 꿰매어 신기’에 능한 현실 부모를 보여주는 듯 하다.
패션브랜드 발렌시아가의 2018 봄/여름 컬렉션 ▶ 영상보기
지난달 21일(현지시각) 프랑스 명품 패션브랜드 발렌시아가는 파리에서 2018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을 발표했다. ‘주말산책’을 주제로 파리 서쪽의 한적한 공원 볼로뉴의숲(Bois de Boulogne)에서 열린 쇼에는 참가모델 68명 중 7명이 자신의 아이 또는 동생과 함께 런웨이에 섰다. 발렌시아가의 아트디렉터 뎀나 바질리아는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공원에 놀러 나온 젊은 아빠들의 사진 수 십장을 참고해 쇼를 기획했다”고 말한다. 발렌시아가의 새 시즌 키워드는 ‘대디코어(Daddycore)’, 즉 아빠 또는 부성을 추구한 패션으로 요약됐다.
독창적인 디자인과 실험정신으로 잘 알려진 발렌시아가는 남녀노소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글로벌 패션브랜드로 유명하다.
‘가짜 아빠’만 보였던 패션계
그 동안 패션계에 등장하던 남성들은 주로 ‘싱글남’이다. 선이 매끈한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뒤 당당한 걸음으로 사무실에 출근하는 ‘성공적인 남성’ 이미지가 남성복 컬렉션의 핵심이었다. 설사 광고의 주인공이 ‘기혼자’ 일지라도, 그는 ‘아빠’ 라기보단 ‘성숙한 남성’으로만 그려졌다. 발렌시아가의 옛 컬렉션들 역시 다르지 않다.
패션브랜드 구찌의 2014년 남성 수트광고 ▶ 영상보기
패션계에 ‘아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인복과 아동복을 함께 판매하는 브랜드의 경우 아빠와 아들이 함께 옷을 멋지게 차려 입은 화보를 줄곧 선보였다. 이런 화보에는 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셔츠부터 악세서리까지 잘 차려입은 부자의 모습이 담겨있다. ‘현실아빠’ 보다는 미디어가 그려낸 ‘이상적인 아빠’만 등장한 것이다.
물론 육아를 포함한 모든 가사노동을 아예 남성의 영역에서 배제하던 과거와 비교하면 이런 화보도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 화보가 그려낸 남성은 ‘아이와 같이 있는 아빠’일 뿐, ‘육아하는 아빠’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패션지 보그(Vogue)의 칼럼니스트 사라 모워는 이 같은 화보에 대해 “아빠와 아들 모두 어울리는 코디를 찾느라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맨 엄마의 노력은 쏙 뺐다”고 비판했다.
‘후줄근한 아빠’를 긍정하라
뎀나 바질리아 발렌시아가 아트데렉터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장바구니를 든 실제 아빠들의 모습이 기존 패션계에서 추구하는 ‘멋진(cool)’모습이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아빠의 모습을 컬렉션에서 재조명하는 게 그의 목표다. “아이를 돌보는 아빠만큼 아름다운 모습은 흔치 않습니다.” 가장 발 빠르게 유행을 포착하는 패션계에서, 테이크아웃 라테를 마시며 혼자 유모차를 끌고 다닐 정도로 육아에 주도적인 ‘라테파파’의 멋에 주목한 것이다.
발렌시아가의 ‘대디코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워킹맘인 조윤주(32ㆍ가명)씨는 “실제 아빠들의 육아 참여수준은 엄마에 비해 낮은데도 유독 아빠육아만 ‘훌륭하다’며 칭찬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패션계에서 ‘진짜 아빠의 후줄근한 육아’를 그대로 조명한 것만으로도 주목할 변화라는 평가도 나온다. 영국 유력 일간지인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에바 와이즈만은 “기존 패션계는 ‘식스팩이 있는 젊은 남성’을 섹시한 존재로, 그렇지 않은 남성은 변해야 할 존재로 그려왔다”며 “늘어진 티를 입고 피곤한 얼굴로 아이와 산책하는 아빠를 현실적으로 다룬 것 만으로도 남성들이 고정관념을 버리고 실제 육아를 긍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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