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론에는 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거품이 빠지면 허상에 그치기 쉽다.
최근 축구판에 불어 닥친 ‘허정무 대세론’의 실체는 뭘까. 울리 슈틸리케(63ㆍ독일) 감독이 물러나며 공석이 된 차기 축구대표팀 사령탑이 초미의 관심이다. 한국 축구의 월드컵 9회 연속 진출도 빨간 불이 켜졌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A조에 속한 한국은 선두 이란에 이어 2위다. 본선 진출 마지노선인 2위는 유지하고 있지만 남은 두 경기(8월 31일 이란 홈-9월 5일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서 삐끗하면 3위로 떨어진다. 3위가 되면 B조 3위와 플레이오프를 거친 뒤 이기면 또 다시 북중미 4위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한다. 후임 감독은 벼랑 끝에서 나머지 두 경기를 소화해야 한다. 만에 하나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 두고두고 ‘역적’이 된다. 감독 자리가 ‘독이 든 성배’가 아니라 ‘그냥 독배’라는 말이 나온다.
‘허정무 대세론’은 구체적인 정보나 팩트에 기반한 건 아니다. 하마평 수준이었다가 언론에서 재생산하고 당사자인 허정무(62) 프로축구연맹 부총재가 “맡겨준다면 각오는 돼있다”고 인터뷰하며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용수(58) 전 기술위원장이 대세론에 불을 지폈다. 그는 슈틸리케 감독 선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위원장직을 사퇴하며 ▶국내파 감독 ▶최종예선 두 경기를 맡은 사령탑이 본선까지 연계 ▶월드컵 최종예선 경험자 등 차기 사령탑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언급했다. 사견을 전제로 했지만 사실상 허 부총재로 못 박은 셈이었다. 허 부총재가 이미 낙점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축구협회 안팎에서도 평소 신중한 이 전 위원장답지 않은 발언이었다며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26일 새로 선임된 김호곤(66) 기술위원장은 “백지부터 다시 시작 하겠다”고 강조하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축구협회는 ‘허정무 대세론’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현실을 봐야 한다. 대세론에 가려진 카드가 있다. 정해성(59) 감독대행이다. 축구협회는 지난 4월 정해성 수석코치를 영입했다. 위기의 대표팀에 중심을 잡아줄 수석코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지난 13일 카타르 원정(2-3 패) 결과가 안 좋을 경우 슈틸리케 감독 대신 정 수석을 감독대행으로 내세워 최종예선 남은 두 경기를 헤쳐 나가겠다는 포석도 있었다. 정 수석 계약기간은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까지라 당장 별도 계약도 필요 없다. 정 수석은 코치로 두 번의 월드컵(2002 4강, 2010 16강)에서 성공했고 프로 사령탑 경험도 있다. 축구협회가 심사숙고 해볼 만한 카드라는데 이론이 없다.
그러나 김호곤호 기술위가 위기 돌파에 ‘정해성 카드’는 약하다고 판단하면 허 부총재로 다시 힘이 쏠릴 수 밖에 없다. 허 부총재는 구태(舊態)하다는 이미지가 있어 팬들 선호도가 약하다. 하지만 감독은 인기로 뽑지 않는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해 국내 지도자 중 본선에서 성공한 유일한 인물인 그는 소방수 자격은 충분하다.
이 경우 감독 계약기간을 놓고 난항이 예상된다.
축구협회는 새 감독 임기를 최종예선 두 경기로 제한하는 ‘원 포인트 릴리프’가 가장 부담이 덜하다. 남은 두 경기에서 180도 바뀐 모습을 보이면 새 감독은 자연스럽게 본선까지 지휘한다. 반대로 월드컵은 가되 여전히 무기력하면 그 때 가서 국내파든 외국인이든 본선 사령탑을 물색하면 된다. 반면 이는 허 부총재 입장에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방식이다.
허 감독이든 정 감독대행이든 사령탑이 되면 신태용(48) 코치, 설기현(39) 코치가 함께 보좌할 거란 이야기도 들린다. 가능한 인적 자원을 모두 끌어 모아 총력 대응한다는 취지다. 신 코치는 최종예선 두 경기만 마치고 내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대표팀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겨 2020년 도쿄올림픽을 준비한다는 시나리오가 유력하다. 아시안게임대표팀이 출전할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지역예선이 당장 다음 달 열리지만 상대 팀들이 약체라 축구협회 전임지도자 등이 임시로 지휘해도 큰 문제없을 거란 판단이다.
아니면 아예 신태용, 최용수(46) 감독 등 40대 기수들에게 한국 축구의 ‘운명’을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앞날이 창창한 젊은 지도자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가능성은 높지 않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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