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고 졸업 50주년 기념행사
“명문고 자부심 누렸으니 베풀자”
참가자 절반 이상, 사후기증키로
“졸업 50주년인데, 여행만 가고 말 거야?”
서울 강남구 소재 경기고 63회 동창회장 홍석교(68)씨는 졸업5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지난해 초부터 몇몇 동창과 ‘의미 있는 동창회’를 위해 머리를 맞댔다. 고교 졸업 후 반세기 동안 수많은 동문들이 정계 재계 등으로 진출한 덕에 ‘명문고’란 간판 아래 자부심도 충분히 누려왔으니, 동창회를 즈음해 함께 사회에 베풀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잔 이유에서다.
아프리카에 가 난민을 돕자는 의견부터, 장학회 또는 후원회 조성까지 아이디어들은 넘쳐났다. 하지만 대부분 ‘실현 가능성’이 떨어졌다. 홍 회장은 28일 “친구들이 나이가 들고, 사회에서도 은퇴한 상태라 몸소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아 슬프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동창 대부분이 올해를 전후해 칠순 잔치를 치르는 마당에, 아프리카를 다녀오자니 체력도, 시간도, 돈도 축날 게 뻔했다. 이런저런 부담으로 참여율이 떨어진다면 안 하니 만 못 할 노릇. 후원회나 장학회 조성의 경우, 자칫 각자 형편에 따라 부담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올해 초 한 동창으로부터 묘안이 나왔다. ‘사후 장기기증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홍 회장은 무릎을 탁 쳤다. 죽은 뒤에도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일인데다, 재산이 많건 적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에서다.
물론 걱정이 없던 건 아니다. 아무리 사후기증이라지만 ‘몸에 칼 대는’ 일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는 국내 정서 때문. 본인은 괜찮다고 해도 가족이 반대할 수 있는 일이라 강요할 순 없었다. 결국 동창들은 동창회 당일 장기기증설명회를 갖고, 개인 판단에 따라 서약하기로 했다.
제50회 동창회가 열린 지난 13일, 행사장인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선 “몇 십 명 하면 다행”이라 생각했던 홍 회장 예상을 뒤엎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행사참가자 180여명 중 절반이 넘는 102명이 장기기증을 서약한 것. 여기엔 김대중 정부 시절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이상철(69)씨 등 사회 지도층이라 할만한 동창들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홍 회장은 “설명회를 진행한 박진탁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이, 사후각막기증을 설명하며 ‘몸에 칼 대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해 다들 겁을 덜 먹은 것 같다”며 높은 참여율의 이유를 밝혔지만, 본부 관계자는 “각막기증뿐만 아니라 뇌사장기기증 서약자도 상당수 있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본부에 따르면 국내 장기기증 희망 등록자는 전 국민의 2.5% 수준으로, 미국(53%)이나 영국(33%) 등 해외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실정이다. 연간 환자 1,200명 가량이 장기이식을 기다리다 목숨을 잃고 있단다. 홍 회장은 “이번 동창회를 통해 장기기증 실천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며 “앞으로 고교 선후배들을 비롯한 지인들에게 ‘장기기증 동창회’를 적극 권유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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