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전환은 신구 문명의 교체를 뜻한다. 곧 어느 나라나 사회가 낡은 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의 역사를 장기적 시각에서 보면 두 번의 문명전환을 겪었다. 하나는 고대에 중국문명을 받아들여 아시아대륙의 북방문명에 기반을 두고 있던 태반문명에서 벗어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에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난숙(爛熟)해졌던 중국문명에서 이탈한 것이다.
한국의 문명전환을 이해하는 데는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는 게 좋다. 인간의 이동, 전쟁의 충격, 물자의 교역이라는 요인이다. 곧 다른 문명 사이에 사람이 왕래하거나 이주함으로써 새로운 문화가 수용되어 번성한 경우이다. 또 전쟁은 나라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일거에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아가 장기간에 걸친 물자의 교역은 국민의 생활을 풍성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세 가지 요인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분리하기 어렵지만, 한국의 문명전환을 거시적 안목에서 파악하는 데는 유용한 틀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엊그제 발발 67주년을 맞은 6ㆍ25 전쟁은 한국의 문명전환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6ㆍ25 전쟁은 틀림없이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와 희생을 가져온 대재앙이었다. 그렇지만 장기적 문명사의 관점에서 보면 6ㆍ25 전쟁은 한국이 동아시아의 중국문명에서 벗어나 보편적 세계문명으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19세기에 들어 중국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양문명을 도입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 것으로서의 완결성을 갖춘 중국문명의 저항이 거세어 이질적인 서양문명을 직접 수용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하여 한국은 일본이 한발 앞서 소화해 낸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갔다. 일본이 그 틈을 노려 한국을 무력으로 침략하고 지배한 사실은 널리 아는 바와 같다. 일제하에서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일본을 경유한 서양문명의 수용 곧 식민지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국의 독립과 해방은 위와 같은 근대문명의 전환에서 획기적 전기(轉機)가 되었다. 한국이 근대화의 주체로 다시 등장하고, 필요에 따라 마음껏 서양문명을 직접 도입할 수 있었다. 미군정을 거치면서 미국이 일본을 대신하여 서양문명을 전파하는 메신저로 부상했다. 미국을 통해 들어온 자유, 민주, 인권, 평등, 시장경제, 자본주의 등은 일본식으로 변형된 서양문명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제가 전시체제기에 한국에 강요한 군국주의는 소련식의 사회주의나 전체주의와 가까운 것이었다. 따라서 거시적 안목에서 보면, 한국이 독립과 해방을 계기로 하여 미국의 문명권에 편입된 것은 일본식 근대문명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반면에 소련의 문명권에 포섭된 북한은 일제말기의 군국주의와 연속된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6ㆍ25 전쟁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세계적 규모로 맞붙은 문명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국은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을 겪으면서도 미국을 주축으로 한 국제연합국군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회생(回生)했다. 그리고 미국식 서양문명의 일원이 되어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였다. 6ㆍ25 전쟁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한국의 문명기반을 송두리째 파괴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에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자유민주적 정치체제를 국시(國是)로서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곧 6ㆍ25 전쟁은 한국이 근대문명에서 현대문명으로 전환하는 데 갈림길 역할을 한 셈이다.
어느 나라든지 역사를 논할 때 전쟁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국가와 민족의 진로를 좌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6ㆍ25 전쟁이야말로 현대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최대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6ㆍ25 전쟁은 한국인의 뇌리에서조차 잊혀져 가고 있다. 화제가 되더라도 6ㆍ25 전쟁의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실상만이 부각되는 느낌이 든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쟁의 비극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곧 6ㆍ25 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다. 이제 한국의 문명전환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6ㆍ25 전쟁의 의미를 논의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이런 거대 담론은 한국의 정체성을 흔드는 작금의 분위기를 순화(醇化)시키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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