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스웨덴으로 ‘노동시간 단축’ 취재를 갔을 때다. 월요일 오전 9시를 조금 넘긴 시각, 반바지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젊은 남자가 유모차를 끌고 꽃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유모차 속 잠든 아기와 꽃다발을 이것저것 들춰보는 젊은 아빠의 모습이 오색찬란한 꽃들 속에서 그렇게 어여쁠 수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속 한 장면처럼 꽃을 고르고 있는 남자 주부라니. 흡사 스토커라도 된 듯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며 꽃집 앞을 서성거리던 나는 마침내 한 다발의 꽃을 사들고 나오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익스큐즈 미, 저는 사우스 코리아에서 온 저널리스트인데요. 당신이 혹시 그 유명한… 라테파파?”
‘라테파파’란 테이크아웃 라테를 마시며 혼자 유모차를 끌고 다닐 정도로 육아에 주도적인 스웨덴 아빠들을 일컫는다. 한국 엄마들이 라테 마시며 유모차 끌면 ‘맘충’인데, 스웨덴 아빠들이 같은 행위를 하면 왜 라테파파로 칭송 받느냐는 매우 타당한 비판은 잠시 잊고, 라테파파의 사전적 정의라 할 만한 그에게 짧은 인터뷰를 청했다. 유모차 속 아기는 9개월 된 아들로 셋째 아이이며, 6개월간의 육아휴직을 마친 아내가 회사에 복직한 후 3개월째 혼자서 세 아이를 돌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두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 준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 보라색 꽃다발은 그가 얼마나 능숙한 가정주부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지표 같은 것이었다.
이름과 나이와 직업을 물었다. 올해 나이 36세, 이름은 요엘 스피라(Joel Spira), 직업은 배우. “와, 배우시군요. 혹시 출연작 중 제가 볼 수 있는 게 있나요?” 당연히 단역 배우일 것이라 생각하며 물은 질문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지 머니(Easy Money)가 좋겠다”며 친절하게 자신의 이름과 작품명을 적어줬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헤어지고 난 후 곧바로 구글 검색.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이지 머니’는 스웨덴 박스 오피스 1위의 흥행대작이요, 요엘 스피라는 영화와 TV 시리즈와 연극 무대를 종횡무진 하며 최근엔 주연급으로 활약 중인 유명 배우였던 것이다. 연기 세계에 관한 인터뷰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노동현실에 대한 코멘트라니, 이렇게 미안할 데가.
지난해까지 출연작이 빼곡히 이어지던 그의 필모그래피는 막내 아들이 태어난 덕분에 올해 공란으로 비어 있다. “매일 사무실에 출근해야 하는 직종과 비교하면 자유롭게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업의 특성 덕분”이라고 했지만, 30대의 한창 잘나가는 배우에게 쉬운 결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의 자유로운 남성 예술가들이 육아를 위해 커리어를 잠시 접었다는 이야기는 ‘육아 예능’에 출연 중인 일부 연예인들 말고 들어본 기억이 없으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전문직이거나 일용직이거나 애 키우는 일은 여성의 독박 의무다. 제도가 훌륭하게 완비됐음에도 한국의 남성 육아 휴직률은 겨우 8.5%. 여성의 육아노동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맘충 문화’와 저 낮은 휴직률 사이에는, 아무렴, 깊은 연관이 있지 않을 리 없다.
고로 아빠 의무 육아휴직제는 대한민국에 만연한 여성혐오 문화를 치유하는 방편으로서도 요긴하다. 인생의 어느 한 시기를 가정주부로 살았거나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란 남성이라면 “임신한 여교사에게 성적 판타지를 느꼈다”거나 “콘돔 사용은 섹스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충분하다”고 써갈길 패기 따위 부릴 수 없을 것이다. 남성이야말로 주부의 삶이 필요하다. 오전엔 애들 먹여 학교 보낸 후 유모차 끌며 꽃 사러 다니고, 오후엔 저녁 차려놓고 빨래 개며 ‘남자란 무엇인가’가 아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남자 마음은 그만 알고 싶으니 ‘남자 마음 설명서’ 같은 건 그만 쓰고 인간으로, 시민으로, 어떻게 공동체 안에 여성과 함께 기거할 것인지를 궁리해야 한다. 그러니까 장차 사윗감에게 물어야 할 내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 “자네는 육아휴직을 얼마나 사용할 텐가?”
박선영 기획취재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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