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책도서관 인기
책이 아닌 사람 빌리는 도서관
시민들 호응 좋았던 서대문구
북카페 등 활용 독서공동체 추진
국내 첫 상설 운영한 노원구도
진로 체험ㆍ창업 등 주제 확대
“어떻게 하면 작가님처럼 글을 잘 쓸 수 있나요?”
“그런 법은 없어요. 무조건 쓰다 보면 스스로 법을 터득하게 되는 거죠.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는 말이 천 년이 지나도 유효한 것 보면 글 잘 쓰는 별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얘기죠. 다만 나를 예쁘게 포장해서 그럴 듯한 인간으로 보이게 쓰는 글은 금방 들통이 나게 돼요."
지난 21일 오후 7시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근처 문학다방 ‘봄봄’에서 ‘사람책도서관’이 열렸다. 말 그대로 ‘책’을 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을 빌리는 도서관이다. 2000년 덴마크의 ‘리빙 라이브러리(살아있는 도서관)'로 처음 시작돼 국내서도 사람이 책이 돼 독자들과 만나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날의 사람책은 ‘여자전(傳), 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를 쓴 작가 김서령(61)씨였다. 그를 빌려 읽기 위해 독자 35명이 모였다. 사람책은 보통 일대일 열람이 기본이지만 소규모 그룹 등 다양한 방식으로도 이뤄진다.
이날 참석한 홍실(36)씨는 “지인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에서 김씨의 책을 인상 깊게 읽었는데 마침 그를 대출하는 사람책도서관이 열린다고 해 왔다”며 “보통 책만 읽고 거기서 멈추게 되는데 작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독자들은 9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지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사람책 김씨를 정독했다.
이날 처음 사람책으로 독자 앞에 선 김씨는 “그 동안 인터뷰를 주로 한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오면서 사람책을 읽어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사람책 콘셉트에 잘 맞았다”며 “이젠 독자들이 책보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대문구는 앞으로 골목서점이나 북카페, 커뮤니티센터 같은 독서문화공간에서 사람책도서관을 열면서 지역 독서공동체를 만들 계획이다. 추리전문서점에서 추리소설작가가 청소년과 만나거나 사회적경제마을센터에서 청년 멘토가 사람책으로 나서는 식이다.
인구 58만명으로 인적자원이 풍부한 노원구도 ‘노원휴먼라이브러리’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2012년부터 국내 최초로 상설 운영되고 있는 사람책도서관이다. 100명으로 시작해 현재 718명의 사람책이 등록돼있다. 독자들은 읽고 싶은 사람책을 골라 대출 신청을 하면 일대일로 만나 열람할 수 있다. 이 도서관 준비모임부터 참여했던 상계백병원 호흡기내과 의사인 최수전(60)씨는 “처음에는 노원 지역의 넘쳐나는 인적자원을 묶어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데서 시작해 사람책도서관으로 발전했다”며 “인류의 지적재산은 독점할 것이 아니라 공유되어야 하며 지식은 나눌수록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노원휴먼라이브러리의 베스트셀러이기도 한 그는 “진로를 고민 중이던 고등학생이 나를 빌려본 후 실제 의대에 진학하고 이후 본인도 사람책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대일 열람뿐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씩 소규모 그룹을 대상으로 동서양 고전을 함께 읽는 ‘북토크’, 세계 도시의 역사ㆍ인문학 기행 ‘여행토크’도 진행하고 있다.
의사 같이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만 사람책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노원휴먼라이브러리 인터넷 홈페이지에 분야별로 분류된 사람책의 주제는 각종 전문지식부터 진로 체험, 창업ㆍ취업 경험 듣기, 주부 9단 살림비법, 삶의 지혜까지 총망라돼있다. 학부모 독자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책 유정열(45)씨는 “두 자녀를 키울 때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와의 소통법, 부모 교육 등을 주제로 독자와 만나고 있다”며 “자격증이나 학위가 있는 사람만 사람책이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누구나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노원구 관계자는 “사람책을 열람했던 청소년 자신이 사람책이 되거나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는 가족 사람책도 생기고 있다”며 “청소년보다 성인의 사람책 열람 횟수가 많아지고, 열람 분야도 마을과 생활로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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