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힌츠페터는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인 기자다. 그의 광주 취재기는 오는 8월 개봉 예정인 영화 '택시운전사'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참 언론인, 힌츠페터의 이야기를 카드뉴스로 정리했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
박주연 인턴기자 wisedragon@hankookilbo.com
1980년 5월 22일 서울 김포공항.
위르겐 힌츠페터는 가슴을 졸이며 도쿄행 일등석 검색대 앞에 섰다.
손에 든 과자봉지 안에는 목숨을 걸고 찍은 이틀간의 진실이 담긴 필름이 있었다.
힌츠페터는 무사히 검색대를 통과했고 필름은 곧바로 독일 현지로 보내진다.
다음날 오후 8시. 독일 제1공영방송 ARD-NDR 방송의 톱뉴스에는 태극기가 선명하게 등장한다.
시체 위에 놓인 태극기와 관 위에 피가 묻은 태극기였다.
시위하는 시민과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군인들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눈을 의심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순간이었다.
1980년 5월 19일. ARD-NDR 일본특파원인 힌츠페터는 한국의 광주에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소식을 접한다.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고 직감한 그는 곧장 서울행 비행기를 탄다.
다음날 오전. 힌츠페터 일행은 잃어버린 직장 상사를 찾으러 간다는 거짓말로 계엄군 병사들의 검문을 통과한다.
시내에 도착한 이들에게 광주 시민들은 뜨거운 환호를 보낸다. 국내 언론이 침묵하는 현실에서 외신 기자들이 진실을 전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
광주 시민들의 안내로 힌츠페터 일행들은 충격적인 장면들을 목격한다.
"한 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너무 꽉 막혀서 사진 찍는 것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21), 상황은 여전히 긴박했지만 그는 광주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급하게 한국으로 오느라 필름을 조금 밖에 못 챙겼기 때문.
계엄군이 총기 소지 여부만을 검사한 덕에 그는 촬영한 필름을 품고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간다.
하지만 관문이 하나 더 있었다.
"필름을 빼돌리기 위해 다음 날 아침 일찍 일본항공 소속의 일등석을 예매했다.
일등석 승객이 되면 의심을 받지 않고 내 물건이 손가방처럼 쉽게 통과돼 안전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독일에 필름을 넘긴 힌츠페터는 다음날 다시 광주로 돌아와 취재를 계속한다.
그의 카메라는 계엄군이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한 27일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촬영한 영상은 독일 전역에 방송된다.
같은 해 9월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판결에 대한 항의 표시로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제목의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이 다큐는 1980년대 중반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이란 제목으로 전국의 성당과 대학가 등에서 비밀리에 상영돼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다.
만약 그가 찍은 영상들이 계엄군과 공항의 검색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 영상들에는 공수부대에 희생당한 시민들의 주검뿐 아니라 평온했던 시민들의 일상이 담겨 있었다.
당시 계엄군 측은 광주 상황을 '폭도가 점령해 아비규환이 된 도시'라는 식으로 언론에 흘렸고, 이를 의심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의 영상이 없었다면 광주의 진실은 영원히 묻혔을지도 모른다.
2016년 1월 25일(현지시간) 힌츠페터는 향년 79세를 일기로 독일의 라체부르크에서 별세했다.
'죽으면 광주에 묻어달라'고 밝힌 고인의 뜻에 따라 그의 유해 일부가 담긴 항아리는 망월동 구묘역에 안장됐다.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위르겐 힌츠페터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현장을 지켰던 치열한 기자정신이 국민의 양심을 깨워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겼다'
2003년 제2회 송건호 언론상 선정 이유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힌츠페터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가 8월에 개봉한다.
영화 연출을 맡은 장훈 감독이 그를 만나 광주로 향한 이유를 물어보자 힌츠페터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당연히 가야죠. 그게 기자가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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