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덜란드식 ‘1.5모델’ 가정
네살ㆍ두살 아이 둘 돌보기 위해
풀타임 남편 40→32시간 근무 단축
파트타임 아내와 번갈아 휴무
#풀타임-파트타임 보장 같아
임금 휴가 복지 등서 차별 없어
직원이 “시간 줄여달라” 요구땐
회사는 이를 거부할 수 없어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 포스코튼시 주택가 아담한 3층 집에 사는 네 살배기 인터에게는 매주 ‘아빠의 날’ ‘엄마의 날’이 있다. 목요일은 아빠가 출근하지 않고 인터와 여동생 메타(2)를 돌봐주고, 금요일은 엄마가 회사에 가지 않는다.
기자가 찾아간 지난달 18일(현지시간)은 아빠의 날이었다. 아빠 에릭 반 덴 브룩(42)씨가 아침을 차리는 동안 엄마 하누카 반 간스(39)씨는 출근 준비에 한창이다. 자고 있던 메타까지 일어나 네 식구가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한국의 맞벌이 가정이라면 아이 챙겨 어린이집에 보내고 각자 출근 준비를 하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를 테지만 그런 분위기는 없다. 느긋한 아침식사 후 회사로 향하는 엄마에게 아빠와 메타, 인터 자매는 포옹과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보낸다.
두 아이의 아침을 마저 먹이고 설거지까지 마친 반 덴 브룩씨는 아빠의 날을 어떻게 보내는지 설명했다. “아이들과 책 읽고 체험형 동물원에 가고 장 보고 요즘에는 저녁 요리도 같이 해요. 중간중간 아이들이 낮잠을 잘 동안 쓰레기 분리 수거나 정원 가꾸기도 하구요. 아내가 오후 7시쯤 집에 오면 식구가 함께 저녁을 먹고 오후 9시 전에 두 아이를 나눠서 재우죠.”
이날 점심에 인터 집에는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같은 동네에 사는 또 다른 아빠가 아이 둘을 데리고 찾아와 샌드위치 점심을 먹고 앞뜰에서 신나게 놀았다. “저처럼 목요일에 아빠의 날을 하는 동네 아빠가 둘 더 있는데 같이 만나서 음식도 나눠먹고 아이들을 함께 놀게 하죠. 아빠의 날 동기들이에요.(웃음)”
잠시 후 메타가 잠자는 사이 아빠가 “함께 요리하자”고 부르자 인터가 후닥닥 달려왔다. 아이는 국자를 들고 아빠가 시키는 대로 휘휘 저었다. 오후 7시가 되자 아내 반 간스씨가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인터가 준비한 생선 요리로 저녁상을 차린 뒤 함께 먹었다.
어린 자매가 집 근처 사설 어린이집에 가는 날은 월ㆍ수요일 이틀뿐이다. 이 때는 부인 반 간스씨가 먼저 출근하고, 남편 반 덴 브룩씨가 아이들을 오전 9시까지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출근해 오전 9시30분부터 일을 한다. 대신 부인이 오후 5시30분에 퇴근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저녁을 준비하고, 남편은 오후 7시에 귀가한다. 매주 화요일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집으로 와 두 아이를 돌봐준다.
미국계 다국적 기업의 중간 관리자인 반 덴 브룩씨와 컨설팅 기업의 중간 관리자인 반 간스씨는 이렇게 주 4일씩 근무한다. 남편은 풀타임(주 40시간) 계약을 했고, 부인은 파트타임(주 36시간) 계약을 했다. 맞벌이 부부 중 한 사람은 풀타임, 다른 한 사람은 파트타임 근무를 하는 네덜란드 식 ‘1.5모델’의 전형이다.
노동시간만 다른 풀타임-파트타임
이들 부부가 주 4일만 출근하며 자녀 양육에 충분한 시간을 들일 수 있는 것은 ‘파트타임의 천국’ 네덜란드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고용 보장부터 임금과 복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늘과 땅 차이지만 네덜란드에서는 풀타임과 파트타임 사이에 차별이 없다.
네덜란드는 노동시간을 주 40시간, 38시간, 36시간 중 각 사업장이 선택하도록 하고 있는데, 민간부문은 주로 주 40시간, 공공부문은 주 36시간을 택하고 있다. 인력을 채용할 때는 빈 자리의 근무시간을 풀타임(FT, 민간부문 기준 주 40시간), 0.8FT(주 32시간), 0.6FT(주 24시간) 등으로 명시하고 조정 가능한 노동시간과 연봉 범위를 제시해 선택 기회를 준다. 대부분 처음 1~2년 계약직을 거쳐 회사와 정규직 채용 계약을 맺는데, 이때 선택하는 풀타임, 파트타임은 오직 노동시간의 차이일 뿐이다.
우선 파트타임도 근로계약의 체결, 연장, 해지 등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법으로 보장하고 있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확고하다. 휴가는 일한 시간에 비례해 받고, 경조사 등 특별 휴가도 풀타임과 똑같은 조건에서 가능하다. 수습 기간은 풀타임과 마찬가지로 2개월을 넘을 수 없다. 연금, 실업 급여, 병가, 육아휴직 등도 똑같이 보장된다. 게다가 노동법은 회사가 심각한 위기에 있지 않는 한 직원이 근무시간을 줄여 달라고 요구할 경우 이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가 1996년 노동시간에 따른 차별금지법 등을 통해 파트타임이 겪는 차별과 애로 사항을 꾸준히 시정해 온 결과다.
이런 환경이니 네덜란드에서는 오히려 파트타임을 선호하는 구직자가 넘쳐난다. 노동자 중 파트타임 비중이 38.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 덴 브룩씨는 주 40시간 일하는 풀타임 정규직이지만 인터가 태어난 이후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하루 8시간씩 주 32시간이다. 반 덴 브룩씨는 “그동안 아내와 제가 쌓아 온 육아휴직을 저는 주 8시간, 아내는 주 4시간을 쓰고 있어요. 형편에 따라 일하고 그만큼 대접받기 때문에 직장에 대한 만족감이 높을 수밖에 없죠”라고 말했다. 네덜란드의 육아휴직은 일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은행 저축처럼 적립했다가 필요할 때 회사와 상의해 일정 기간 아예 쉬거나 일하면서 근무시간을 조금씩 줄이는 방식으로 쓸 수 있다. 두 사람은 후자를 택했다. 반 덴 브룩씨 부부는 인터가 만 네 살이 돼서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 근무 시간을 다시 늘릴 것을 고려 중이다. 육아휴직 후 원래 자리로 복귀하는 것도 법으로 보장돼 있다.
“풀타임 찾기가 더 힘들어요”
공공 부문도 마찬가지다. 암스테르담 인근 브뢰컬런시의 명문 경영전문대학교인 니엔로드경영대는 전체 교직원 351명 중 파트타임이 205명(58.4%)으로 절반을 훨씬 넘는다. 파트타임 직원 중 여성이 150명(73.2%)으로 남성 55명(26.8%)의 3배 가까이 된다. 이 대학 인사총괄팀장인 아만다 로든씨는 “요즘엔 풀타임으로 일할 사람을 찾는 게 훨씬 힘들어요. 인재들이 일과 가정의 양립을 실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기 시간을 바라기 때문이죠. 좋은 사람이 필요한 조직으로서는 파트타임에 더 신경을 쓰고 근무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밝혔다. 초등학교에서조차 한 반에 두 명의 담임 교사가 월·화·수와 목·금으로 요일을 나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네덜란드의 파트타임제는 1980년대 전까지는 여성 인력 활용 차원에서 운영되다가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 1982년 노사정이 타협한 바세나르협약 이후 일자리 나누기 차원에서 활성화했다. 2000년 노동시간조정법을 제정해 노동자 필요에 따라 일하는 시간을 자유롭게 줄이거나 늘릴 수 있도록 했다. 다양한 파트타임 자리가 생기면서 어린 자녀나 돌봐야 할 가족이 있는 이들, 학생, 청년 등이 노동시장에 쉽게 진입했다. 네덜란드 통계청에 따르면, 2006년 노동 인구는 바세나르협약이 체결된 1982년보다 250만명이 증가했다. 풀타임의 노동시간은 협약 이후 5%가량 줄었다.
“직원의 자율과 책임이 혁신 가능”
파트타임이라면 아무래도 회사에 대한 충성도, 일에 대한 책임감이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나올 법도 하지만 네덜란드에선 찾아보기 어려웠다. 짧은 시간 일하더라도 내가 맡은 일은 내가 책임지고 한다는 문화가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프루흐덴힐데어리푸드는 분유와 유제품을 한국 등 전 세계 130개 나라에 수출해 1년에 약 7억유로(약 8,9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다. 암스테르담 인근 나이케르크시에 있는 본사에서 만난 알버트 드 그로트 대표는 “풀타임, 파트타임 상관없이 모든 직원들에게 자율성을 보장합니다. 윗사람이 일일이 지시하지 않고 직원 스스로 성과를 관리하도록 하죠”라고 말했다. 드 그로트 대표는 “회사는 직원들이 꾸준히 자기 계발을 할 수 있게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라고 강조했다. 회사는 조력자이자 동반자라는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한다.
직원 스스로 업무성과를 책임지려면 상명하복의 경직된 문화가 있어선 안 될 일. 네덜란드 기업에서 2년 동안 풀타임과 파트타임으로 1년씩 일한 강지은(36)씨는 한국과 너무 다른 직장문화에 여러 차례 놀랐다고 했다. “하루는 회의가 길어지니까 직원 한 사람이 다른 회의가 있다며 먼저 일어나고 또 다른 사람은 먼저 퇴근하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더라고요. 상사가 지시를 해도 불합리하다고 여기면 ‘아니오’라고 말하는 문화니까요. 대신 내가 빨리 일해야 빨리 퇴근할 수 있기 때문에 점심도 각자 알아서 도시락으로 해결합니다.”
노동자의 만족감은 회사의 발전에도 원동력이 된다. 드 그로트 대표는 “20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근무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직원→행복한 고객→행복한 주주’의 순환 구조를 회사의 핵심 전략으로 삼으면서 20년 동안 꾸준히 회사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자유를 보장하고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없애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를 위한 혁신도 달성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헤이그·포스코튼·브뢰컬런·나이케르크=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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