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끈한 유교적 결속력과 인맥
정치권력 유착 통해 급성장
상장회사 70%가 ‘화인’ 소유
중국 의식 약해진 2ㆍ3세는
한류, IT, 모바일 등에 관심
한국기업 상생ㆍ협력 모색을
중국의 대외 무역투자 진흥 업무를 담당하는 ‘중국국제무역촉진위원회(China Council for the Promotion of International Trade)’는 지난해 12월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연락 사무소를 개설했다. 한국의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일본의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와 비슷한 성격의 중국 국가기관의 인도네시아 진출 뒤에는 화인(華人)이 자리잡고 있었다. 화인이 창업한 현지 컨설팅 회사가 중국인 직원을 앞세워 연락 사무소 설립에 필요한 자문을 하고 실무 절차를 대행한 것. 중국 본토의 자본과 인력이 동남아시아로 들어오는데 가교 역할을 수행해 온 화인의 위상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 3개국 순방이 화제다. 대통령 특사로는 처음으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베트남을 차례로 방문한 박 시장의 행보는 현지에서도 남다른 눈길을 끌었다. 기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4강 일변도 외교에서 벗어나 아세안으로도 시선을 돌리겠다는 한국 정부의 의지가 환영받은 덕분이다. 떠오르는 신흥시장 아세안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지기 위해 간과해서는 안 될 존재가 있다. 바로 동남아 경제의 실력자 화인 자본이다.
대만 행정원 산하 교무위원회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동남아에는 3,000만 명에 달하는 화인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 세계 화인 인구 4,300여만 명의 약 70%를 차지하는 규모이다. 인도네시아(840만 명), 태국(700만 명), 말레이시아(660만 명), 싱가포르(290만 명), 필리핀(150만 명) 등 동남아 지역에 아시아 화인 인구의 90% 이상이 몰려 있다. 태국처럼 화인들이 토착 사회에 비교적 원만하게 동화돼 온 국가가 있는가 하면, 말레이시아 전체 인구의 30%를 구성하는 화인들은 고유의 정체성을 상당 부분 고수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광둥성(廣東省), 푸젠성(福健省) 등 동남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 남부 지방 출신이 화인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점도 특징이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15세기 초 명나라 정화의 대원정을 계기로 무역상을 중심으로 한 화인들의 동남아행이 본격화됐다고 설명한다. 이후 19세기 말~20세기 중반 중국 대륙의 정치적 격동기와 맞물려 노동자 계층 화인들의 대규모 동남아 이주가 진행됐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한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화인들의 입김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화인 자본은 정치 권력과의 유착을 토대로 부동산, 유통, 식품, 금융 등 분야로 사업을 급속하게 확대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홍룽 그룹, 태국의 CP 그룹, 인도네시아의 살림 그룹, 필리핀의 SM 그룹 등 개별 국가를 넘어 동남아를 대표하는 화인 재벌들이 속속 탄생했다.
이들 화인 자본은 동남아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실제 동남아 증권시장 상장사의 70%가 화인 기업일 만큼, 소수의 화인 자본이 사실상 동남아 민간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경험적으로 이런 시각에는 다소 과장된 측면도 없지 않다. 실례로 동남아 토착 집단이 운영하는 기업 중에는 회사 공개를 꺼려하는 가족 그룹들이 제법 많다. 이와 함께 화인 사회 내에서도 하층민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 역시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인 경제권’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동남아 경제에서 화인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토착 세력들이 역사적으로 화인 자본에 꾸준히 반감을 표출해 온 것도 경제적 종속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화인 자본의 성장에는 유교적 공동체 정신에 기반한 끈끈한 결속력과 인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거론된다. 예를 들어 푸젠성 출신 화인들이 손잡고 신도시 부동산 개발 사업을 주도하는 형식 등으로 힘을 모으는 식이다. 여기에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자식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는 일 또한 낯설지 않다. 물론 세대가 거듭될수록 중국인으로서의 공통분모는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 부모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은 화인 재벌 2, 3세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 유럽 등에서 공부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중국어보다는 영어가, 중국식 가치보다는 서구식 가치에 익숙한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일까. 화인 1세대들과는 달리 글로벌 트렌드를 쫓아 전자상거래, 스타트업 등 새로운 사업 영역에 뛰어드는 데도 거침이 없다.
최근 동남아 시장의 중요성이 부쩍 강조되면서 현지 진출을 타진하는 한국 기업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수 세기에 걸쳐 동남아 전역에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노하우를 쌓아 온 화인 자본과 맞서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금융, 유통 분야 등을 필두로 화인 기업들과 협력하며 상생 기회를 찾는 게 현실적일 방안이 될 수 있다. 마침 화인 재벌 2, 3세들이 한국이 강점을 보유한 정보통신(IT) 및 모바일 분야 등에 경쟁적으로 시선을 돌리고, 한류 열풍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반가운 소식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동남아 화인 자본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다가가야 할 때이다.
화인: 중국 정부는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계 주민 중 중국 국적 보유자를 화교(華僑)로, 해당국 국적 보유자를 화인(華人)으로 구분한다. 현재 해외 거주 중국계 주민의 80% 이상이 현지 국적을 취득한 화인으로 추산된다. 일상적으로는 화인 범주에 화교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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