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한국과 일본의 첫 국가 간 공식 회담이 1952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앞서 51년 10월 연합군 사령부 중재 하에 실무자 간 예비회담이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였고, 냉전 긴장이 팽팽해지던 때였다. 소련 팽창정책에 이미 동구가 공산화했다. 중국 공산정권에 맞서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구상하던 동북아 지역안보 체제의 관건이 한일 협력이었다. 양국은 13년 뒤인 1965년 6월 22일에야 한일기본조약에 조인했다. 그만하면, 국민 감정과 협상 자체 득실을 제쳐둔다면, 약소국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압박에 버티며 꽤 끈질기게 협상에 임했다고 할 만했다.
조약은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4개의 부속 협정- 청구권 및 경제협력, 재일교포 지위, 어업, 문화재ㆍ문화 협력-으로 이뤄졌다.
협상은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첫 회담에서 한국은 식민 지배 배상을 요구했고, 일본은 한반도에 남긴 일본인 사유재산 보상을 주장했다. 2차 회담은 독도 문제와 평화선(이승만의 60마일 해양주권선) 요구로 어그러졌고, 3차 회담 땐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일본의 36년 한국 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했다”고 발언하는 바람에 결렬됐고, 4차 회담은 재일 교포 북송문제로 교착했다. 그리고 60년 4ㆍ19 혁명이 발발했고, 이승만 정권이 붕괴했다.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에게는 이승만의 고집과 독선적 자존감조차 없었다. 오히려 권력 정통성과 공산주의 활동 전력 탓에 미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그는 도쿄 6차 회담 중이던 62년 11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보내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 비밀협상을 벌이게 했다. ‘김-오히라 비밀 메모’라 불리는 둘의 합의로 회담은 급물살을 탔고, 64년의 한일협상 반대 ‘6ㆍ3항쟁’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2월 조약에 가조인했다. 협정은 65년 12월 비준됐고, 양국 국교가 정상화됐다.
무상공여와 차관 등 협상의 득실에 대해서는 지금도 말이 많다. 식민지배 반성과 사죄의 언급이 일절 없어 굴욕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일본은 3억 달러 무상 공여금을 대외적으로는 과거사 청산 배상금이라고 주장했고, 자국민에게는 경제협력 자금이라고 홍보했다. 부속협정(재산 청구권 협정)에는 “(개인 법인을 포함한 일체의 재산 권리 청구권 등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2조)는 조항을 넣었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의 한ㆍ일 외무장관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도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이라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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