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이 머리를 싸맨 게 1601년쯤이었다. 4세기가 지난 지금은 ‘무엇을 사느냐(Buy),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Live)’를 고민한다. 상품도 정보도 차고 넘치는 시대, 우리는 지쳤다. 쇼핑은 때로 고된 노동이다. 집중력, 판단력, 결단력, 정보력에 체력까지 끌어 모아야 실패하지 않는다. 스마트폰과 리모컨 누를 힘만 겨우 남기고 퇴근하는 ‘을’들에겐 가혹한 일이다.
먹거리는 특히 문제다. 매일 장 보는 삶은 저녁이 있는 삶보다 훨씬 비현실적이다. 외식은 지겹고 편의점 간편식은 믿을 수 없고 패스트푸드는 위험하다. ‘아무리 바빠도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난이도 높은 욕망을 읽고 등장한 것이 푸드 정기 배달 서비스다. 전문가가 고른 제철 식재료와 귀한 기호 식품이 매주 혹은 매달 현관까지 배달된다. 비용은 싸지 않다. 정기 배송으로 가격이 떨어지는 생수, 기저귀와는 다르다. 최대한 귀찮지 않은 방식으로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데 지불하는 가격이다. 깐깐한 귀차니스트들이 기꺼이 지갑을 연다.
농장에서 현관까지(Farm to Door)
평양냉면, 순대국, 삼겹살, 치킨, 빵, 파스타, 라면까지, 직장인의 주식은 채소를 배제한다. 신선한 채소를 사다 손질해 먹고 치우는 건 번거롭다. 그래서 샐러드 정기 배송 서비스가 나왔다. ‘만나 박스’는 충북 진천 스마트팜에서 키운 유기농 채소를 씻고 잘라 포장해 매주 보낸다. 배송 당일 수확한 채소다. 일주일치(채소 300g과 드레싱)가 9,900원, 카페 라테 두 잔 값이다. 1년 만에 회원이 2,000명을 넘겼다. 땅에서 썩는 친환경 소재의 포장 용기를 쓰는 건 착한 소비에 민감한 회원이 많아서다. 카이스트 08학번 공학도 동기 두 명이 공동 대표다. 푸드와 테크놀로지의 결합에 미래가 있다는 걸, 유기농 식품 유통 업체 홀푸드를 최근 인수한 제프 베조스 아마존 대표보다 먼저 알아 본 것일까.
샐러드로는 영 헛헛하다면, 어머니 손맛이 그립다면, 나물을 정기 배송받을 수 있다. 나물을 말리고 씻고 다듬고 데쳐 보내는 ‘나물 투데이’. 레시피는 스마트폰으로 보내 준다. 20대 청년 네 명이 가업을 이어 받아 지난해 창업했다. 매주 바뀌는 제철 나물 3가지(200g)가 1만5,000원 정도다. 전통시장보단 비싸고 대형마트보단 싼 가격이다. 비싸도 내 몸을 위해서라면! 먹거리에 관한 한 “더 싸게, 더 많이”를 고집하는 건 촌스럽다.
청정 식재료의 본산은 제주. 푸드 마일리지(식재료 생산지에서 식탁까지의 거리)가 늘 문제다. ‘무릉외갓집’은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리에서 나는 제철 친환경 농산물을 종류별로 약 5㎏씩 매달 보내 준다. 지난달 작물은 카라향과 파파야, 한라산 고사리, 비양도 톳, 조풍 감자, 흙우엉이었다. 1년 비용은 43만8,000원. 홍창욱 실장은 “대기업, 대형 마트와 경쟁할 생각은 없다”며 “농부가 흘린 땀의 가치를 인정해 주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익금은 무릉리 영농조합원 41명이 나눠 갖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주 방문해 화제가 됐다.
식재료를 받아 들고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수준이라면, 요즘 대세인 쿠킹 박스가 있다. 지지고 볶기만 하면 되는 상태로 계량ㆍ손질된 재료와 레시피가 상자에 담겨 온다. 조리는 스파게티, 라면 만큼 쉽고, 결과물은 근사하다. 우엉 가자미 조림, 태국식 새우 팟타이, 아보카도 불고기ㆍ낙지 덮밥… 원조 격인 ‘테이스트샵’에서 2,3인분 재료를 매주 두 번 받는 가격은 3만 6,800원이다. 김규민 대표는 “요리하는 즐거운 경험까지 배송받는 비용”이라며 “가족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어 하는 남성 회원이 30% 정도”라고 했다.
취향을 배달해 드립니다
세상 흔한 게 맥주다. 그런 맥주를 굳이 정기 배송해 주는 스타트업 ‘벨루가’. “인생은 짧고 맛 봐야 할 맥주는 많다”며 편의점ㆍ마트에서 팔지 않는 독특한 크래프트 맥주 8병(4종류)을 매달 두 번 보낸다. 한 달 비용은 6만원. 술을 온라인 판매하거나 택배로 부치는 건 불법이지만 음식과 함께 배달하면 괜찮다. 벨루가는 맥주에 어울리는 안주를 함께 배송하는 것으로 틈새를 뚫었다. 쌉쌀한 IPA 맥주에는 고소한 안주를, 맑은 라거에는 짭짤한 안주를 보낸다. 김상민 대표는 “남성이 많이 찾을 거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모유 수유를 끝낸 젊은 엄마를 비롯해 맥주 욕구를 팡 터뜨리고 싶어 하는 여성 회원이 더 많다”고 했다.
맥주 만큼 흔한 게 과일. 역시 정기 배송 서비스가 있다. 기왕이면 좋은 과일을 골라 먹고 싶어하는 30~40대와 과일 한두 알 씩만 사는 게 눈치 보이는 1,2인 가구에서 주로 이용한다. 과일 소믈리에인 조향란 ‘올프레쉬’ 대표가 제철 과일을 골라 보낸다. 1,2인 가구 용(3㎏)은 3만원. 이번 주엔 대추토마토 300g, 수박 350g, 블루베리 100g, 자몽 1개, 참외 2개, 망고 1개, 골드 키위 2개가 배송됐다. 일주일 동안 약간 모자란 듯 먹을 수 있는 양이다.
거금 들여 산 과일ㆍ채소 착즙기를 몇 번 신나게 돌리다가 어느새 찬장에 집어 넣고 잊어버리는 건 많은 이의 경험일 터. 청량 음료와 다를 바 없다는 시판 주스는 께름칙하다. ‘콜린스그린’은 과일ㆍ채소 착즙주스를 정기 배송한다. 350㎖짜리 두 병을 매주 세 번씩 받으면 한 달에 19만8,000원, 한 병에 8,250원이다. 국밥 한 그릇 가격이지만, 매일 약 200명이 주스를 받아 마신다. 재료를 사다 씻고 자르고 갈고 찌꺼기 분리 수거까지 하는 수고를 생략하는 비용이다. 커피 마니아를 위한 커피 원두 정기 배송도 있다. ‘테라로사’는 싱글 오리진 커피 드립백을 매주 보낸다. 30개씩 한 달 받아 보는 가격은 14만5,000원.
“뭐 이런 걸 시켜 먹나” 싶기도 하지만, 푸드 정기 배송 시장은 더 커질 것이라고 한다. KB금융지주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간편함, 편리함, 건강함을 한꺼번에 추구하는 현대인 식습관에 딱 맞는 것이 O to O(Online to offlineㆍ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음식 배달 서비스”라며 “시장이 더욱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고 쪼개 여가를 즐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대형 마트나 시장 쇼핑은 그저 귀찮은 일”이라며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양질의 먹거리를 받을 수 있는 정기 배송 서비스 분야가 점점 세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장 보러 다니는 풍경은 ’21세기 초까지 존재한 인류의 일상’으로 미래의 교과서에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윤한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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