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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잡는 과학]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 최면으로 30시간 전 범죄현장 돌아가 맞춰

입력
2017.06.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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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2015년 2월 14일 새벽 5시, 전북 정읍시 상동. 남모(31)씨를 태운 택시가 골목 어귀에 멈춰 섰다.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오른손에 휴대폰을 움켜쥔 채 차에서 내린 그의 걸음이 지그재그를 그렸다. 업무상 술을 마실 일이 잦긴 했지만 유난히 술에 많이 취한 날이었다.

원래는 남자친구가 지인들과 함께 있다는 술자리에 잠시 들를 참이었다. 하지만 가던 도중 남자친구와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고, “혼자 집으로 가겠다”고 한 뒤 차에서 내렸다. 남씨는 도보 약 10분 거리로 다소 먼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취기도, 새벽 찬 공기도, 집으로 가는 길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검은 차량이 자신의 걸음걸이와 속도를 맞추며 쫓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는 사실만 뺀다면, 별 문제 될 건 없었다.

남씨가 왼쪽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집이 코 앞이었다. 그 때 검은 차량이 비상등을 켜고 섰다. ‘딸각’ 차량 문이 열리고, 운전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골목에는 남씨와 차량에서 내린 ‘정체불명’ 남자밖에 없었다. “악”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남씨가 사라졌다. 순식간이었다.

마침 출근 중이던 트럭운전사 A씨가 비명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비명소리가 난 곳과 A씨 사이에는 성인 키보다 큰 풀들이 빼곡한 공터가 있었다. 직선거리는 50m지만 어둠과 풀숲에 가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꽤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났고,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A씨는 비명소리가 났던 곳으로 급히 달려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사람은 없었고, 핸드폰과 가방, 하이힐이 널브러져 있었다. 저 멀리 검은 차량 한 대가 큰 길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누군가 납치된 것 같아요. 비명소리가 분명 났는데, 사람이 사라졌어요.” A씨 신고에 상동지구대원들이 급히 출동했다. 사건 현장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지구대가 있어 출동에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A씨가 차량 한 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큰 길로 사라졌던 그 차였다. “저 차가 범인인 것 같아요.” A씨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차량이 다시 큰 길 쪽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경찰이 뒤를 쫓았지만 양쪽으로 갈라진 길 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조수석에 타고 있던 경찰이 차량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신고자 말대로라면, 차량 안에 여성이 타고 있는 게 분명했고, 서둘러 그를 잡아야 했다. 정읍경찰서에 비상이 걸렸다. 동원 가능한 경찰 320여명이 전원 투입됐다.

오전 8시쯤. 자취를 감췄던 용의차량이 정읍시 공평동 주천삼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문검색 중이던 경찰이 막아 세운 차량 안에는 예상대로, 사라졌던 남씨가 타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남씨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얼굴 곳곳엔 멍이 들어 있었다. 폭행이 남긴 흔적이었다. 경찰은 남씨를 차로 1분 거리(600m)에 있는 정읍아산병원으로 후송했고, 운전자 박모(43)씨를 긴급 체포했다. 유력한 용의자가 잡혔다. 피해자 역시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수사는 일단 순조로웠다. 피해자가 입을 열 때까지는.

피해자 남씨는 사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머리에 난 상처, 얼굴 곳곳에 보이는 폭행 흔적에도, 그는 “모르겠다”는 답을 반복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운전자 박씨는 “억울하다”고 발뺌했다. 한동희(52) 정읍경찰서 강력1팀장은 “30년 가까이 형사 생활하면서 그렇게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범행을 부인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 난항이 시작됐다.

박씨 주장은 이랬다. “지인들과 밤늦게까지 어울리다 차를 몰고 부모님 댁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사건 현장을 지나게 됐다. 어떤 남성이 각목 같은 것으로 피해자를 때리는 것을 봤고, (내가) 다가가자 범인이 도망갔다. 피해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기에, 병원에 데리고 가 응급조치를 하기 위해 차에 태웠던 것이다.” 범인으로 몰리는 게 억울한,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항변이었다.

‘사건현장에는 왜 다시 돌아왔냐’는 질문엔 엉성하기 짝이 없는 답을 내놨다. “여자가 핸드백을 놓고 왔다고 했고, 범인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돌아갔다. 그런데 현장에 가니 경찰이 이미 출동해 있어 ‘경찰이 가방을 챙겼을 것’이라고 말하고 부상을 입은 여성을 치료하려고 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한 팀장을 포함한 수사팀원이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심스러운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치료를 위해서였다면 가까운 정읍시내 병원으로 향했어야 했다. 하지만 박씨는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전주로 갔다가 김제를 거쳐 다시 정읍으로 들어왔다”고 진술했다. 정작 병원 간 흔적은 없었다. “전주예수병원이나 김제우석병원으로 데려다 주려고 했다” “생각나는 곳이 거기뿐이었다” 등 변명을 늘어놨지만 명쾌하지 않았다. 게다가 박씨는 위치 조회를 피하려는 듯 휴대폰을 소지하지 않은 채였고, 차량 안에선 남씨 손목에 묶여 있던 청색테이프가 발견됐다. 정황은 박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경찰은 사건현장 반경 2㎞ 이내 폐쇄회로(CC)TV 11대를 시간대별로 분석했다. 범행 장면이 담긴 CCTV는 없었지만, 박씨 차량이 택시에서 내린 남씨 뒤를 500m 가량 뒤쫓아간 사실은 확인됐다. “(목격한) 범인 차량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고 박씨가 진술한 지점에 설치된 CCTV를 분석해봤지만, 다른 차량이 지나간 흔적은 없었다.

수사팀이 바빠졌다. 무엇보다 박씨를 구속하는 게 급선무였다.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는 용의자를 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법적으로 체포 후 48시간 내에 구속을 할 수 있는 물증을 찾아내야 했다. 피해자 남씨는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술에 취해 있던 데다, 둔탁한 ‘어떤 것에’ 머리를 맞아 뇌 손상(전치 4주)을 입은 터였다. 한 팀장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도움이 절실했다.

그 때 한 팀장 머리에 ‘법(法)최면’이 떠올랐다. ‘피해자 기억을 살릴 수만 있다면’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법최면 수사는 강력사건 피해자 혹은 목격자가 심리적 외상 혹은 정서적 충격을 받았거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사건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할 때 주로 쓰는 수사 기법이었다. 깊은 명상에 빠질 때 같은 상태로 사건 당시에만 고도로 집중하도록 유도해,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학수사 기법 중 하나다.

한 팀장은 전북경찰청에서 함께 일한 적 있는 법최면 전문수사관 박주호(44) 경위에게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납치 사건이 일어나서 용의자를 긴급 체포했는데, 피해자가 전혀 기억을 못합니다. 범인 얼굴을 보여줘도 아니라고 합니다. 빨리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남씨가 입원해 있는 정읍아산병원 4층 특실이 최면 조사장소로 탈바꿈했다. 사건이 발생한 30시간 전으로 피해자 기억을 되돌려놓기 위해, 박 경위가 남씨 앞에 섰다. 남씨는 부상이 심해 눈을 제외한 온 얼굴을 붕대로 감은 채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최면수사관입니다”라는 박 경위 말에 남씨는 코웃음을 쳤다. “저는 최면수사 같은 건 믿지 않아요. 부모님 외에 다른 사람은 절대 믿지 않는 사람이라 최면수사가 먹히지도 않을 거고, 어차피 잘 생각도 안 날 겁니다.” 실제 사전 테스트 결과에서도 최면 감수성이 매우 낮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심리적 방어기제를 깨부수는 작업이 우선 필요했다. 최면이 무엇이고, 어떤 절차로 이뤄지며,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다. 거부감을 덜기 위해 이례적으로 남씨 남자친구도 입회하도록 했다. “최면에 걸려도 (당신을) 조종하지는 않아요. 최면 상태는 수면내시경에서 막 깨어난 것과 같은 상태 정도로 이해하면 돼요.” 최면수사에 대한 오해를 푸는 과정에도 상당한 시간을 쏟았다. 굳은 자세로 박 경위를 대하던 남씨가 그제야 ‘수사에 응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 단추는 일단 꿰어졌다. 박 경위는 “남씨와 심리적인 친밀감을 높이는 작업도 필요했는데, 통상보다 2배 이상 시간이 필요했다”고 했다.

본격적인 최면이 시작됐다. “저랑 약속했죠? 아주 잠깐 동안만 사건에 들어갔다 옵시다. 시간이 지난 일이니 너무 아파하지 말아요. 제가 옆에 있으니 불안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박 경위 물음과 동시에, 남씨는 30시간 전으로 되돌아갔다.

“차 타고 가자.” 범인 목소리가 또렷하게 기억났다. “어디 가는데요. 저는 집에 갈 거에요.” 거부했지만, 그가 내뱉는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타! 빨리 타!” 그가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하이힐을 벗어 휘두르기 시작했지만 소용없었다. 4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외모, 모자가 달린 검은색 상의. 남씨가 말하자, 박 경위가 용의자 사진을 다시 봤다. 분명 용의자로 지목된 박씨였다.

박씨에게 오른쪽 팔을 잡힌 채 조수석에 강제로 태워졌다. 박씨가 왼쪽 주머니에서 청색테이프를 꺼내 손목을 3번 가량 돌려 묶었다. “가만히 있어!” 손목을 묶자마자 박씨가 ‘무언가로’ 머리와 얼굴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출발한 차량은 한적한 도로를 내달리고 있었다.

“저 정읍으로 가게 해주세요. 제발 저 좀 보내주세요.” 계속해서 풀어달라 말했다. 머리에선 계속 피가 흘러나왔다. 조용하던 박씨가 입을 뗐다. “병원에 데려다 줄게.” 대신 조건이 붙었다. “잘못한 건 있지만, 되도록 경찰에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차량이 다시 정읍 쪽으로 향했다.

최면은 그렇게 끝이 났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거에요. 앞으로 좋은 일들만 생길 거에요.” 박 경위가 병실을 나갔다. 한 팀장은 “피해자가 진술을 하지 못하고, 피의자가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는 이번 사건에서 최면수사는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미 확보해 둔 CCTV 분석 결과에 남씨 진술을 추가, 구속영장이 곧바로 신청됐다. 구속된 박씨는 결국 범행사실을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검찰로 송치됐다. ‘왜 남씨를 납치하려고 했는지’에 대해 박씨는 끝까지 입을 닫았다. ‘성범죄를 위해 납치했을 것’이라고 경찰이 추정할 뿐이었다. 2015년 9월 2심인 전주지법 제4형사부는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 박씨에게 1심과 동일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정읍=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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