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법 부장판사부터 신참까지
판사 100명 계급장 떼고 격론
일선 판사들 사법행정 상시 참여
전국법관회의 상설화 등 요구
대법원에 공 넘겨… 내달 2차 회의
전국에서 모인 100명의 판사들이 19일 대법원에 요구한 내용은 매우 도전적이면서 공세적이라고 볼 수 있다. 법원행정처고위 간부와 판사들에 대한 사법행정 업무 배제,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직접 조사, 사법행정업무에 일선 판사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전국법관회의 상설화와 법적 근거 마련 등 일련의 요구는 사법개혁 시도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관측에 힘을 더하고 있다. 대법원의 반응 여하에 따라 사법개혁의 봇물이 터지는 전환점이 될 가능성도 있다.
19일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선 법원행정처 인적쇄신을 비롯한 사법개혁 논의가 쏟아졌다. 의결서에는 “사법행정권 남용조치의 의사결정 및 실행과정에 참여한 사법행정담당자들은 더 이상 사법행정업무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대법원장 인사권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법원행정처의 대대적 물갈이 요구는 일선 판사들이 법관회의 빌미가 된 법원행정처의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사법개혁 논의 축소 압력 의혹에 대해 매우 격앙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날 회의에서는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상설화해 일선 판사들이 사법행정에 상시 참여하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이를 위해 대법관 회의에 ‘전국법관대표회의 설치ㆍ운영 규칙’의 제정을 요구할 계획이라고도 밝혔다.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사법행정권과 인사권에 일선 판사가 관여할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공보 간사인 송승용 수원지법 부장판사는 “법관회의 상설화는 제도개선에 대한 하나의 틀”이라고 말했다.
판사들은 이날 9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전국법관회의가 구성한 현안조사소위원회에 이번 사태와 관련한 조사권한 위임도 요구하기로 의결했다. 이들은 앞서 이 사태를 조사한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의 조사기록과 자료를 제출해달라고 요구했다. 소위원회는 진상조사위의 조사기록을 검토하고 추가조사와 관련한 사항을 다음달 24일 열리는 2차 전국법관회의에 보고하기로 했다. 소위원회의 조사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기획조정실 소속 판사들이 지난해와 올해 업무상 사용한 컴퓨터와 저장매체를 보전해달라는 요구도 담았다. 소위원회가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로부터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거나 자료 제출 협조를 거부당하면 전국법관대표회의에 보고하도록 했다.
통상 정적인 판사 조직에서 이 같은 개혁 논의가 활발했던 데에는 ‘계급장’을 뗀 난상토론도 한 몫 했다. 판사회의에서 호칭은 모두 판사로 통일했다. 사법연수원 14기인 민중기(58) 서울고법 부장판사부터 로스쿨을 졸업하고 올해 2월 임관한 차기현(40) 판사까지 연차, 직급 차이가 컸지만 자유롭게 의사 표현을 위해 ‘부장판사’ 등 직급을 떼고 논의에 참가한 것이다. 공보간사인 송 부장판사는 “판사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열심히 논의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판사 100명이 빠짐 없이 발언을 이어가면서 회의는 9시간을 넘겼다. 무기명 비밀투표 대신 손을 들어 표결했다.
판사들은 이날 나온 논의 내용을 이르면 20일 양 대법원장에게 전달할 방침이다. 상당히 도전적인 일선 판사들의 요구에 양 대법원장이 어떻게 반응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전국에서 판사들이 모인 건 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의 촛불집회 관련 재판개입 의혹으로 열린 판사회의 이후 8년 만이다.
고양=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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