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으로 4개월 넘게 총수 없이 항해 중인 삼성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올해 삼성의 해외기업 인수합병(M&A)은 실종됐고 이미 결정된 투자 외에 대규모 신규 투자는 감감소식이다. 특히 삼성의 미래 운명을 좌우할 글로벌 네트워크의 중심축이 무너졌다는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다.
18일 재계에 따르면 2014년 5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병상에 누운 이후 총수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부회장은 연간 약 120일의 해외출장을 소화했다. 글로벌 비즈니스 창출에 주력한 이 부회장이 그간 해외에서 만난 거물들은 애플 최고경영자(CEO) 팀 쿡,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 구글 공동창업자인 알파벳 CEO 래리 페이지,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대표이사를 비롯해 수백 명에 이른다.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의 협업에 오너 경영자들의 네트워크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이 구속된 지난 2월 17일 이후 이런 통로가 막힌 셈이다. 삼성 관계자는 “글로벌 비즈니스의 세계에는 전문경영인이 뚫기 어려운 그들만의 리그가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영업이익(29조원)을 남긴 데 이어 올해 1분기에도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9조9,0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증권가는 2분기에 분기 최대인 13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점치고 있다. 그러나 역대 최고를 갈아치우고 있는 실적과 달리 내부적인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지금의 경이적인 실적은 4, 5년 전 대규모 투자의 결실이지만 당장 앞으로 4, 5년 뒤를 내다본 공격적인 투자 분위기가 감지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 의지로 지난해 11월 80억 달러(약 9조4,000억원)에 인수한 미국 전자장비 기업 하만 이후 삼성의 대형 M&A는 자취를 감췄다. 삼성은 신사업을 위해 2015년 이후 미국 인공지능(AI) 플랫폼 개발업체 비브랩스, 고급 가전업체 데이코, 클라우드 서비스기업 조이언트 등을 사들이며, 매년 5개 가량의 해외기업 M&A에 성공했다. 그러나 올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최종적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사람이 없다. 구속상태에서 1주일에 3회씩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부회장은 최근 경영 현안을 챙기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너의 승부사적 판단으로 성장한 많은 글로벌 기업들처럼 삼성도 이건희 회장이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다. 이어 1983년 ‘도쿄 선언’을 통해 메모리 반도체에 뛰어들어 오늘의 신화를 만들었다. 휴대폰이나 바이오산업 등 그룹의 체질을 바꾼 변곡점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무려 15조6,000억원을 투자해 경기 평택시에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 것도 총수의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이 부회장의 구속만기는 오는 8월 27일이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얽혀 있는 최순실씨와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의 재판이 지연되고 있어 구속만기 전 1심 선고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무섭게 변하는 글로벌 ICT 업계에서 빠른 결단으로 방향을 정하지 못할 경우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성원 선임기자 sungwon@hankookilbo.com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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