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의 테스트 촬영 날, 분장을 하고 나타난 배우 이제훈을 아무도 몰라봤다. 눈 앞에 이제훈을 두고도 스태프들은 그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그곳엔 반듯한 모범생 대신 웬 불량한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나 자신을 깨끗이 지워내고 온전하게 캐릭터로만 보이길 바랐어요. 그런데 다들 깜짝 놀라니까 좀 당황스럽던데요(웃음).” 14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이제훈은 박열이 된 첫 순간을 머쓱한 웃음으로 기억했다.
‘박열’은 이제훈의 필모그래피에 인장처럼 새겨질 것 같다. 영화 ‘파수꾼’(2011)과 ‘건축학개론’(2012)을 잠시 잊어도 될 만한 새로운 ‘인생작’을 만났다고 평한다면 조금 과한 걸까. 꼭 맞춘 옷을 입는 그는 생동하는 에너지로 팔딱거린다.
영화는 1923년 일본 간토대지진 이후의 도쿄를 비춘다.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방화를 저질렀다’는 괴소문이 퍼져 무고한 조선인 6,000여명이 학살됐다. 화제를 돌릴 구실이 필요했던 일본 내각은 아나키즘 단체 불령사를 이끌던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한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버릇 없는 피고인”이었다. 오히려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자 황태자 암살 계획을 스스로 털어놓고 사형까지 무릅쓴 법정 투쟁을 벌인다. 그의 곁엔 연인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가 함께했다. 이준익 감독과 이제훈은 이 믿지 못할 실화를 90% 이상 사실에 가깝게 고증해 스크린에 복원했다.
영화 속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심문하는 예심판사(검사)를 들었다 놨다 할 만큼 기개와 의지, 용맹함과 해학이 대단하다. 대역죄로 기소한다는 말에 “수고했다”며 격려까지 건넨다. 이제훈도 감탄했다. “일본은 당시 박열처럼 저항하는 조선사람들을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이라는 뜻에서 ‘불령선인’이라 불렀는데, 박열은 아예 대놓고 ‘불령사’라는 조직을 만들잖아요. 정말 호기롭지 않나요.”
하지만 박열에 빠져들어 감정이 고양될수록 연기는 절제했다. 그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자신을 다스려야 했다”고 돌아봤다. “캐릭터가 아니라 메시지가 남아야 하는 영화예요. 배우가 감정을 발산하고 해소해버리면 메시지가 흩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박열이 영웅으로 미화되는 것도 경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다짐이 무너진 적이 있다. 철창에 갇힌 상태에서 조선인의 무고한 죽음을 목격하는 장면이었다. 시나리오엔 대사가 없었지만 끓어오르는 화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감독에게 양해를 구하고 촬영 때 욕설을 해버렸다. 그게 더 박열다웠다. 이제훈은 “이 장면이 심의에 걸릴까 싶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12세 관람가를 받았다”며 웃었다.
또 다른 숙제는 일본어 대사였다. 영화에 함께 출연한 재일동포 3세 배우 김인우 등이 녹음해준 가이드를 무한 반복해 들었다. 밥 먹을 때도, 스태프와 잡담을 나눌 때도, 대사를 읊고 또 읊었다. “박열의 일본어 대사는 얼마나 외웠는지 지금도 스위치 누르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말할 수 있어요. 연기를 하다 카메라가 멈추면 감독님이 아니라 일본어 감수하시는 분들을 쳐다봤어요. 그분들에게도 이질감 없이 들리는 게 목표였습니다.”
일본에서 생활해 일본어가 능통한 최희서도 이제훈에게 의지가 됐다. 그는 “가네코 후미코 없이는 박열을 설명할 수 없다”며 “관객들이 박열을 보러 왔다가 가네코 후미코와 최희서에 대한 궁금증을 품고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박열이 불꽃 같은 삶을 태웠던 당시 나이 스물둘이었다. 이제훈도 그 나이를 뜨겁게 보냈다. 연기학원에 다니고, 극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부지런히 오디션을 봤다. 스물다섯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에 다시 진학했다. “누군가 선택해줘야 할 수 있는 일인데 계속 기회를 기다려도 될까, 먹고 사는 문제는 감당할 수 있을까, 무작정 꿈만 좇다가 낙오자가 되지는 않을까” 고민하던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배우의 꿈은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상을 품고 현실과 싸워 자기 확장을 이뤘다는 점은 박열과도 비슷하다.
이제훈은 ‘박열’과 박열을 통해 자신도 몰랐던 모습을 새로이 발견했다고 한다. 기존 이미지와 연기 스타일에 안주했다면 결코 몰랐을 모습이다. 그는 “잘하는 연기만 하면 편하겠지만 재미는 없을 것”이라며 “도전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아직도 저는 성장하고 있어요. 제 안에는 보여드릴 것들이 많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더라도 여전히 궁금하고 기대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거기에 세월의 깊이와 인간미까지 더해진다면 더 좋겠지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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