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성석제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284쪽ㆍ1만3,000원
문학이 가진 다종다양한 기능 중 ‘재미의 기능’에 충실한 장르를 단 하나 꼽으라면 엽편소설이다. 글자 그대로 나뭇잎 넓이, 5쪽 안팎의 짧은 이야기는 가볍고 일상적이라서 소설 한편을 다 읽는데 5~10분이면 족하다. 웬만하면 5명을 넘지 않는 단순한 인물 구도, 단 하나의 사건은 당대 농담의 패턴을 담고 있다.
전자책 출판과 인터넷을 통한 작품 연재가 무시로 일어나는, 그리하여 이제 작가도 스크롤의 압박을 계산해야 하는 시대, 엽편소설에 또 하나 기능이 추가된다. ‘책 물성 보존의 기능’. 스마트폰 화면에서 스크롤을 내려가며 읽기보다 책으로 묶을 때, 읽는 맛을 극대화할 수 있다. 어디를 펼쳐도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를 입맛대로 골라 키득거리다 보면 OOO시리즈로 점철되는 유머들을 굳이 책으로 사서 읽었던, 그때 그 시절 향수와 맞물리며 책의 물성이 주는 아날로그 감성이 극도로 자극된다.
산문시와 수필, 소설의 교집합처럼 읽히는 62편을 묶은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1994)로 데뷔한 중견 소설가 성석제가 또 한편의 엽편소설집을 냈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2007), ‘인간적이다’(2010)의 일부에 올해 새로 쓴 작품들을 보태 무려 55편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의 주무기인 풍자와 해학, 익살과 능청이 책 곳곳에서 퐁퐁(성석제 소설을 말할 때, 이런 부사 하나쯤 써야 예의가 아닌가!) 솟는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반세기도 더 지난 아득한 옛날, 시골초등학교의 인구밀도는 오늘날에 비해 서너 배는 높았다. 따라서 변소도 웅장하리만큼 크고 넓었다.’
저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골초등학교 변소에 출현한 새끼 고양이만한 쥐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뉴트리아의 전설’은, 여름철 다이어트로 고민하는 독자들께 식사 5분 전 일독하길 권하나 너무 지저분해 기사에서는 생략한다.
‘성석제표’ 맛있는 대사의 비결인 팔도 사투리가 이 짧은 이야기들에서도 빛난다. 비행기 운항 에피소드를 담은 ‘기우’에서 농한기 효도관광을 떠나는 10여명의 노인들은 “날개 끄티가 쪼매 금가고 들린 기 뿌라진 거 같다”며 논쟁을 벌이고, 진짜 비행기 날개 끝이 구부러진 것으로 결론, 회항한다.
‘다른 비행기가 올 때까지 승객들은 공항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서너 시간 뒤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식사가 나왔다. (…) “아따요, 머 우리가 잘한 기 있다고 이래 밥까지 주노, 미안쿠로. 반찬도 많구마 이래도 비양기 회사 안 망하나 모를따.”’
16년 만의 마을 이장 선거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 ‘성억제’씨를 출연시켜(‘특별히 멋을 내다’) 입담의 신호탄을 쏘는 책은, 대통령 한 마디에 ‘외부에서 전기를 공급받아 날개만 돌리고 있을 뿐’인 풍력발전기를 돌리는 군수(‘마을 발전 사업’), 신도시 상가주택 매입을 권하는 부동산 경제소장에게 ‘그럴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것을 ‘필력’을 다 해 설명하는 소설가 K(‘진짜 알짜 부자’) 등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고압선에 튀는 불꽃같은’ 인물들을 묘사하며 세태를 비튼다. 신작과 함께 데뷔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역시 짧은 소설집인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2003) 개정판도 나왔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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