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에 발표되는 단편소설은 대개 200자 원고지 80매 안팎의 분량이다. 이 분량은 문예지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 문학의 특별한 역사 안에서 형성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서구 문학의 노벨레(novelle)나 숏 스토리(short story)와는 조금 다른 미학적 형식을 이루게 된 것 같다. 엄밀한 이야기는 하기 어렵겠지만, 소설 하면 으레 떠올리는 서사적 흥미와 현실 개관을 어느 정도 감당하면서 동시에 언어의 밀도를 상당한 수준에서 유지하는 형식쯤으로 말해볼 수 있을까. 그렇다는 것은 인생의 단면, 단일한 인상과 같은 교과서적 요구 이상의 문학적 기능을 한국의 단편소설이 감당해왔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문학적 감흥과 울림을 전제로 때로는 현실 비판의 과제를, 때로는 언어적 실험을 저 짧은 분량의 서사 안에 담아온 작가들이 정말 대단하다 싶다.
말을 바꾸면 한국에서 단편소설은 그렇게 녹록하고 편한 읽기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훈련된 독자라고 할 수 있는 문학평론가 후배가 하루에 읽을 수 있는 단편소설의 최대치를 서너 편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실제로도 한 편의 단편소설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최소한 두 번의 읽기는 불가피한 것 같다. 서사 정보의 압축과 지연을 통한 독자와의 머리 싸움이 문체의 층위에서 세심하게 의미를 쌓는 작업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파에 누워 편히 읽기에는 맞춤한 양식이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수고가 문화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기가 곧 한국 문학의 황금기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문예지의 단편소설이 일간지의 월평란에서 다루어지며 화제를 생산하곤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문예지의 단편소설을 찾아 읽는 이가 얼마나 될까.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나 몇몇 작가의 소설집 말고는 사실상 단편소설은 독자로부터 꽤 멀어진 양식이 된 듯하다. 최근 한국문학을 둘러싼 여러 위기 진단과 더불어 문학출판 시스템에 다양한 혁신이 모색되면서 단편소설의 창작과 수용 양식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문예지의 경량화와 연성화를 선언한 몇몇 잡지에서 선도하고 있는 방식은 30∼40매 분량의 짧은 단편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컴퓨터를 통한 독서 환경의 변화에도 적응하면서 점점 짧아지고 있는 독자들의 독서 호흡에 맞추겠다는 의도이리라. 기왕의 길이에 익숙한 눈에는 다소 어정쩡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분량에 맞는 서사의 리듬, 상상력을 기대해볼 수 있는 일이겠다. 문학 역시 변화하는 세상의 일부일 것이다.
“생각보다는 문학의 시대가 빨리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얼마 전 한 선배에게서 들은 말에 바로 동의를 표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렇게 사라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세대의 특정한 문학적 경험이 아닐까.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는 서구 문학에서 리얼리즘의 발전을 검토하면서 그 장구한 흐름이 현실을 좀더 깊고 넓은 시야에서 파악하게 된 인간 인식의 확대와 발전의 역사이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인간 현실의 역사적 진전에 포개어진다는 점을 확인한다. 저자가 <오디세이> 이야기를 통해 알려주는 것처럼 서사 문학의 원류 하나는 그 스타일에서 의미의 원근법을 모른 채 현실의 명징한 감각적 재현에 충실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스타일은 <구약>인데, 그것은 “호메로스 얘기와는 달리 우리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 여기서는 표현되지 않은 것의 암시와 숨어 있는 배경의 의미가 관건이 된다. 생각해보면 미메시스의 역사, 소설의 발전은 이 두 흐름 사이의 진자운동을 포함하면서 이루어져온 것일 테다. 지금 우리는 이 진자운동의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 것일까.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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