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세자는 바뀌지 않는 권력의 다음 후계자다. 때문에 세자라는 인물군을 생각하면, 세상 천하에 가장 잘난 인물이거나 성군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시대적 배경에 따라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갖고 있겠지만, 미래의 왕으로서 당당함과 기품은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당연한 믿음이 있다.
그래서 영화 ‘대립군’ 속 광해군의 모습은 의외다. ‘대립군’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도망간 선조 대신 나라에 남겨진 어린 세자 광해군과 그와 함께 전란을 헤쳐 나간 대립군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여진구가 연기한 광해군은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용포를 입고 남들이 태워주는 가마 위에 앉아 크게 흔들리는 인물이다. 근엄하기는커녕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하다. ‘폭군’으로 알려져 왕의 칭호까지 박탈당한 것으로 알려진 광해군이지만, 그의 세자 시절 모습은 예상과 달리 나약하고 무기력하기만 하다.
이런 모습을 연기한 것에 대해 여진구는 “지질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용포가 굉장히 안 어울리는 인물이다. 태어나 보니 왕세자였을 뿐 남들이 봐도 안 어울리고 자기도 용포를 벗고 싶어 한다. 이 점을 관객들이 느꼈으면 해서 무게감 주는 사극 톤을 최대한 걷어 냈다”고 설명했다.
이는 앞서 여진구가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세자 역을 맡아 보여준 이미지와도 전혀 다르다. ‘해를 품은 달’을 포함해 그동안 여진구는 아역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오빠’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듬직하고 성숙한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그런 여진구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선보인 영화에서 미성숙한 어린 왕을 맡았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하다. 그는 “광해군 캐릭터가 어딘가 끊겨 있는 것 같은 사람인데, 왕과 왕세자의 모습으로는 보여주기 힘든 모습이라 새로웠다. 나로서도 이전에는 보여드리지 못했던 모습인 것 같아서 욕심이 났다”고 전했다.
광해군은 전쟁 중 임시 왕을 맡게 돼 전쟁의 막막함을 느끼는 와중에 아버지인 선조로부터 버려졌다는 사실마저 알게 된다. 하지만 대립군에게 힘을 얻고, 자신이 누구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간다. 특히 대립군의 수장 토우(이정재 분)가 “임금이 되고 싶지 않냐”고 묻자 광해군은 ‘맞다’ ‘아니다’가 아니라 “너는 내 백성이 되고 싶은가”라고 반문한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보다는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군주로 그려진 점이 인상 깊다. 여진구는 “광해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대사인 것 같다. 그 대사를 보고 믿음직스러웠다. 주변을 바꾸는 것보다 본인에게 자격이 있는지 계속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광해군 시절이 아니더라도 대립군과 같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 죽는 천민들은 많이 있어왔다. 많은 어두운 현실 속에서 광해가 영화의 소재로 선택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그가 세자 시절 보여준 애민 정신이 2017년 현실에서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이란 인물은 관객들에게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여진구 역시 “영화를 하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며 “광해의 모습이 내게 크게 다가왔다. 내가 광해를 연기했지만 새삼 ‘좋은 역할이었구나’ 다시 생각하게 됐다. 특히 백성 역할을 한 선배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생각보다 많이 와 닿았다. 그래서 광해가 부러웠다. 주변 사람들을 아낄 줄 알고, 믿음을 줄 수 있는 모습을 배우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주희 기자 lee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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