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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중의 고전산책] 상앙(商鞅)의 변법이 던지는 의미

입력
2017.06.1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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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 중엽, 중국의 진나라가 서쪽의 변방이라는 지리적 취약점을 극복하고 천하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변법을 통한 개혁을 추구한 상앙(商鞅)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위(衛)나라 왕의 첩의 소생으로 태어난 상앙은 젊은 시절에 위나라 재상인 공숙좌(公叔座)를 섬겼다. 공숙좌는 그가 두려운 인물이 되리라는 점을 알아봤다. 어느 날 병에 걸린 공숙좌는 위문 온 위나라 혜왕(惠王)에게 자신이 죽으면 자신을 대신해 상앙에게 큰일을 맡기라고 건의한다. 그러나 혜왕이 이를 귀담아 듣지 않자 공숙좌는 만일 상앙을 등용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를 죽여 다른 나라로 가지 못하게 하라는 섬뜩한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는 그는 다시 상앙을 불러 자신이 추천했다고 한 뒤, 만일 혜왕이 너를 등용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으니 멀리 떠나가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상앙은 왕이 자신을 등용하라는 말도 듣지 않았는데 죽이라는 말을 듣겠느냐며 위나라에서 유유히 살아간다.

출중한 능력이 있었으나 비주류인 상앙이 뜻을 펼치기에는 조국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판단에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만나 뜻을 펼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는 21세의 진나라 효공(孝公)이 천하의 현명한 사람을 구한다는 ‘초현령(招賢令)’을 발표하자, 진나라로 가 측근 경감(景監)을 통해 효공을 만났다.

상앙은 무려 세 차례나 효공을 만나 유세했으나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상앙은 효공의 의중을 알아채고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 왕권의 강화 등을 제시하여 밤새도록 이야기 꽃을 피웠다. 상앙이 내세운 것은 귀족의 특권 폐지와 군주 권한의 강화, 공적에 따라 상을 주는 등 기존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강력하고도 급진적인 개혁이었다. 그러나 효공은 변법의 실행에 뜸을 들였다. 상앙이 말했다.

“의심하면서 행동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 (<사기> ‘상군 열전’).

개혁에는 자기 확신과 결단력이 필요하고, 비판과 비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감룡(甘龍)과 두지(杜摯) 등 보수파들의 반대는 거셌다. 법을 고치느냐 과거의 예법에 얽매이느냐의 논란에서 효공은 상앙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를 좌서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바꾼 법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법을 지키면 상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백성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 상앙은 백성들의 신뢰를 얻기 위한 기지를 발휘한다.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도성 저잣거리 남쪽에 세우고 백성에게 말했다. “이 나무를 북쪽 문으로 옮겨 놓는 자에게는 십 금(金)을 주겠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나무는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상앙은 상금을 올려 말했다.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오십 금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반신반의하며 이것을 옮겨놓자 상앙은 즉시 그에게 오십 금을 주어 나라가 속이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새 법령을 온 천하에 알렸다.

효공의 전폭적 지지에 힘입은 상앙은 토지 사유제도 실시하고 귀족의 세습권을 박탈하는 등 파격적 개혁을 이어나갔다.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 효공의 태자가 법을 어기자, 태자를 벌하고자 하자 주위에서 반대하니 태자의 스승에게 경형(黥刑, 이마에 먹물을 들이는 형벌)을 내려 잘못 가르친 책임을 물었다. 한치의 예외도 없이 법을 집행하고, 오직 효공만을 위해 개혁을 도모한 지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효공은 여전히 상앙의 편이었지만, 보수적 신하들과 외척은 물론이고 가혹한 법치로 인한 백성들의 원한도 높아갔다. 은자 조량(趙良)은 엄형과 준법은 재앙만 남긴다면서 덕정을 병행하고 이제는 물러나라고 충고했으나, 상앙은 듣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다.

다시 10년이 흘렀다. 효공이 죽고, 그의 태자 혜왕(惠王)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혜왕과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안 기득권층이 상앙을 모반죄로 밀고하자 혜왕은 즉시 체포하게 했다. 상앙은 급히 달아나 변방의 한 여관에 묵으려 했지만, 여관 주인은 “상앙의 법에 의하면 여행증 없는 손님을 묵게 하면 함께 처벌받는다”고 했다. 상앙은 “아! 법을 만든 폐해가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하고 탄식하며 다시 위(魏)나라로 도망쳤으나 위나라는 그를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결국 상앙은 체포되어 거열형(車裂刑)으로 죽음을 맞는다.

“타고난 성품이 잔인하고 덕이 없는 사람”(‘상군열전’)이라는 사마천의 혹평처럼 그는 거침이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거나 속도 조절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변법으로 진나라는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개혁과 변혁은 어쩔 수 없이 충돌과 갈등의 과정을 거치지만, 그 성과는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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