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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석학 칼럼] 팍스 아메리카나 이후의 삶

입력
2017.06.1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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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의해 형성된 유럽과 동아시아의 전후 질서가 흐트러지고 있다. 파리 기후협약에서 탈퇴한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결정은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프랑스에서 드골 시대 이후 처음으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유럽은 더 이상 미국의 리더십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명언했다. 독일 총리이자 대서양주의자의 말이라는 게 역설적이다. 전제국가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변신한 독일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미국을 필요로 해왔기 때문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점진적 종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떤 제국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세계가 오랜 냉전체제에 말려들면서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국제질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더 나은 질서를 세우는 데 방해가 될지 모른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초대 사무총장인 헤이스팅스 이스메이 경이 명언했듯, 나토의 목적은 “러시아를 막고 미국을 끌어들이고 독일을 억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더 이상 ‘억제될’ 필요가 없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러시아가 계속 ‘배제’돼야 하는가도 논란이 있다. 한가지는 트럼프가 옳았다. 그가 거칠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일본뿐 아니라 유럽은 미국의 군사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미국에 대한 집단방위 의존이 미국의 동맹국을 속국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미국도 공식적으로는 제국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 제국이 갖던 공통의 딜레마는 오늘날 동아시아와 서유럽 양쪽에서 목격된다. 만약 미국이 자신의 리더십을 너무 빨리 포기한다면 혼란이 따를 것이고, 덜 자애로운 강대국들이 그 진공상태에 뛰어들 것이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시스템이 너무 오랫동안 군림하는 것도 미국의 동맹국들이 자신들의 방위에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을 저해한다.

제국의 질서가 해체될 때 종종 폭력이 수반된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오토만 제국의 멸망을 가져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몰락하자 살인적 반유대주의, 급진적 민족주의가 뒤따랐다. 요시프 티토의 소 발칸제국인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자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영국령 인도제국이 분할된 국가를 방치했을 때 100만 명 이상의 힌두교도와 무슬림들이 끔찍한 종교분쟁에 목숨을 잃었다.

트럼프 시대는 미국 주도의 전후 질서가 종말을 고할 경우 그 결과를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미국의 리더십은 분명히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 불필요한 전쟁을 가져오고, 공산주의와의 싸움에 너무나 많은 좋지 못한 동맹국들의 지지를 강요했다. 그러나 많은 긍정적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서구 유럽, 일본, 심지어 언급이 늦었지만,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보호 아래 자유와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지나친 반공 테제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우월적 지위는 이념적 극단주의를 제어하는 역할을 해왔다. 공산주의나 파시즘의 변종, 혹은 급진적 민족주의는 그 어떤 것도 팍스 아메리카나 아래의 유럽에서 발호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최근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선거는 트럼프가 유럽의 포퓰리즘적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것보다는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포퓰리스트 물결이 더 커지고 잔혹해진다면 억제할 길이 마땅찮다.

일본에서 대미 의존과 공산주의에 대한 우려는 진보세력을 위축시키고 보수파를 거의 영원한 집권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의 극단적 보복정책 또한 제어해 왔다. 하지만 미국이 더는 믿을만한 보호자가 되지 못해 중국에 대한 두려움이 패닉으로 번지면 쉽지 않을 일들이다.

동독에서 자란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선임자들과 달리 러시아의 전략적 구도를 경계해왔다. 미국이 리더십의 왕관을 내려놓는다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러시아와 중국이 득을 볼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는 워싱턴이나 뉴욕보다 베를린, 심지어 파리에 더 가깝다. 유럽은 러시아나 중국과 친해짐으로써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또한 미국 대통령이 너무나 잘 알듯, 러시아나 중국이 나토 회원국이나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의 세력 잠식에 따른 불안정성의 증대는 적잖은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미국의 우월적 지위가 아무리 짜증나고, 미국이 휘두르는 파괴적 전쟁이 개탄스러워도, 미국의 정책과 대통령, 심지어 문화적 관행에 대한 비판은 허용될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건강한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서구가 함께 지향하는 ‘공통의 가치’다.

중국이 지배하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비판은 특히 경제분야의 파문으로 이어질 것이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는 중국 시장에서 돈을 벌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를 검열하고 있다.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남기를 열망하는 서구 미디어들은 무엇을 인쇄하고 무엇을 방송할 것인가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것이다. 이는 개방과 표현의 자유를 원칙으로 하는 우리 사회를 해칠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말이 군사적 침략이나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애정 어린 향수로 미국의 제국을 회상할지도 모를 시기에 대비해야 한다.

이언 부르마 미국 바드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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