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군사정권 권력 연장 시도
박종철ㆍ이한열 사망 사건 기폭제
학생ㆍ직장인 등 500만명 거리로
직선제 쟁취해 민주주의 새 전기
시민들 승리 경험ㆍ집단기억이
지난 겨울 촛불혁명으로 이어져
‘날자! 고도리’는 ‘아기공룡 둘리’의 작가 김수정이 1982년부터 월간지 ‘직장인’에 연재한4쪽 만화다. 늘품 없는 만년 말단사원 ‘고도리’를 주인공 삼아, 직장인의 애환을 특유의 해학과 뭉툭한 페이소스로 전하던 작품이다. 무능한 사고뭉치이면서 불평만 많아 툭하면 그만두라는 상사의 질책에 시달리던 고도리가 모처럼 우쭐댄 때가 있었다. 30년 전 오늘 ‘6ㆍ10 민주항쟁’ 때였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밤낮없는 도심 시위와 최루가스 때문에 고도리네 회사가 단축근무를 하던 날, 그 기회를 놓칠 새라 고도리는 동료들을 꼬드겨 빈 사무실에서 노름판을 벌인다. 하지만 그는 돈을 다 잃고, 늦은 밤 귀가하다 눈먼 ‘짱돌’에 부상까지 당한다. 다음날 붕대를 감고 출근한 그를 동료들은 우러러보고, 고도리는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흘리듯 말한다. “참을 만하면 참으려고 했다.”(87년 7월호 ‘날자 고도리’)
1987년 6ㆍ10항쟁은 1979년 쿠데타와 80년 광주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군사정권이 대통령 간선제 5공화국 헌법으로 군부권력을 연장하려 하자 시작된 시민 저항운동이었다. 야당과 재야, 대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나섰고, 직장인 등 시민들이 동참하면서 시위는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산됐다. 앞서 1월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숨졌고, 이한열이 최루탄에 쓰러졌다. 5월 출범한 범야권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ㆍ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서부터 집권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6ㆍ29 선언’까지, 항쟁은 약 20일간 이어졌다. 연인원 500여 만 명이 참가했고, 절정이던 6월 26일 ‘평화대행진’에는 전국 37개 도시 130여 만 명이 거리에 나섰다. 6월 항쟁은 박정희의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가장 역동적인 전국적 항쟁이었다. 창백하던 한국 민주주의에 핏기가 돈 것도 사실 그 때부터였다.
진실 못지않게 보여지는 진실이 중요해지는 때가 있다. 고도리가 투사로 변신해도 이상할 게 없는 순간들. 그런 사건의 주역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한 생을 바쳤을 명동성당 농성장의 항쟁 지도부도, 자고 나면 거리로 나가 을지로와 퇴계로 시청 앞 도로의 맨 앞에서 경찰 방패와 곤봉에 맞서던 학생들도 아니다. 역사와 민주주의 같은 아득해 보이는 것들에 대체로 무심하고 어지간하면 참는, ‘고도리’처럼 분노의 비등점이 아주 높은 이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골조들을 세워왔다. 6ㆍ10항쟁은 시민들이 스스로의 가치와 힘과 가능성을 몸으로 체험한 사건이었다. 그 승리의 경험과 집단 기억이 이어져,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시민들이 지난 겨울 광화문의 촛불들을 밝혔을 것이다.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풍경이 바뀌듯, 시간의 풍경도 현재의 시간에 좌우된다. 시민들은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바로 그 헌법과 제도로, 요지부동이던 적폐의 현직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냈고, 버젓한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 지난 두 정권의 투미한 정치에 대비되는 효과가 없진 않겠지만, 문재인 정부의 지금까지의 행보는 가히 자랑스럽다. ‘6월민주항쟁30년사업추진위원회’의 공식 웹사이트 주소(www.kdemo.kr)에서도, 트위터 계정 이름(‘데모의 민족’)에서도 그런 자부심이 엿보인다. 문화제와 대동제가 축제처럼 치러졌고, 열사ㆍ희생자 추모제도 모처럼 성대했다. 요컨대 지금 우리는, 꽤나 너그럽고 여유롭게 30년 전 오늘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셈이다.
6월 항쟁의 의의와 한계ㆍ과제를 논하는 학술대회도 잇따랐다. ‘반독재 민주화’로 집결했던 부문운동은 87년 이후 새로 열린 민주주의의 지평 위에서 노동ㆍ농민 운동으로, 환경ㆍ인권 등 다양한 시민운동 분화하며 역량을 키워왔다. 하지만 그 해 12월 대통령 직접 선거의 승자는 군부정권의 후보 노태우였다. 제도 정치는 이후 선거를 통한 거듭된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귄위주의의 틀을 벗지 못했다. 그 어떤 민주주의의 길도 압도적ㆍ완결적 승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6월 항쟁의 뼈아픈 교훈 중 하나였다.
또 하나, ‘고도리’의 80년대와 6월 항쟁의 87년은 이른바 ‘3저 호황(저금리 저환율 저유가)’ 의 시대였다. 취직의 어려움도, ‘월급쟁이’의 애환도 결코 지급 같지는 않았다. 그 무렵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신자유주의가 틀을 완성해가고 있었고, 10년 뒤 한국은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았다. ‘날자 고도리’의 연재는 90년 4월 끝이 났다. 아마도 고도리는 얼마 뒤 직장에서 떨려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됐거나 영세 자영업자로 살았을 것 같다. 그리고 지난 겨울 광장의 시민들 속에, 고단한 중ㆍ노년의 그도 서 있었을지 모른다.
6ㆍ10항쟁의 승리는 그렇게 시민들을 배반하기도 했지만 시민들은 끝내 민주주의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 힘은 학자들이 정리해낸 ‘6ㆍ10항쟁 정신’같은 한두 마디의 근사한 가치가 아니라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다”던 ‘고도리’같은 이들의 분노 안에도 있다. 민주주의의 완결적 승리가 없듯이, 그 어떤 멋진 권력도 시민들의 분노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분노를 누르는 힘이 곧 반민주주의라는 것도 6ㆍ10항쟁에서 지금 우리가 환기해야 할 교훈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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