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들 복지ㆍ안보에 더 관심
보수당 ‘치매세’ 공약ㆍ테러 악재
메이 총리 ‘하드 브렉시트’ 차질
“시계가 멈췄다(stop the clock).”
8일(현지시간) 치러진 영국 총선 결과 집권 보수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일간 가디언이 내놓은 반응이다. 테리사 메이 총리의 조기총선 도박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안 그래도 꼬인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브렉시트’ 여정에 더욱 암운이 드리워지게 됐다는 설명이다.
메이 총리는 총선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 “6석만 잃어도 선거에서 진 것”이라고 썼다. 제1당이 되더라도 현재 의석(330석)에서 6석이 줄어 과반(326석)에 미달하면 승리를 내줬다고 평가할 만큼 배수의 진을 치고 선거에 임했다. 그의 기준대로라면 12석이나 상실한(318석) 이번 투표 결과는 완벽한 패배나 다름없는 셈이다. 언론들도 “메이가 제 발등을 찍었다”고 보도하면서 극적인 반전에 놀라워하는 표정이다.
이번 총선은 사실상 ‘브렉시트 선거’로 불렸다. 19일 EU 집행위원회와 본격적인 브렉시트 협상 개시를 앞두고 메이 총리는 4월 “강력한 협상력이 필요하다”며 조기총선 카드를 꺼내 들었다. 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에서 모두 탈퇴하는 이른바 ‘하드 브렉시트’를 선언해 유럽은 물론, 내부 반발도 적지 않은 터라 EU와 협상에서 물러서지 않으려면 강한 리더십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정작 총선 과정에서 유권자들은 브렉시트보다 복지와 안보 등 정통 선거 주제인 민생 이슈에 주목했다. 제1야당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는 부자증세, 철도ㆍ우편 국유화 등 선명 좌파 공약을 내걸고 보수당 집권 7년간 계속된 긴축ㆍ불평등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특히 보수당이 노인요양 지원 대상을 축소하는 ‘사회적돌봄’ 공약을 내놓자 야당과 노년층을 중심으로 ‘치매세’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면서 지지율 구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총선 막판 터진 맨체스터ㆍ런던 브리지 테러는 보수 정권의 전유물인 안보 정책마저 유권자들의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젊은이들을 투표소로 이끌었다. 한 때 20%포인트 넘게 벌어졌던 양당의 지지율 격차도 1%포인트까지 좁혀졌다.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전국을 구석구석 누빈 코빈의 ‘옛날 방식’ 사회주의 선거운동이 먹혀 들었다”며 “보수당 지지 기반인 남부와 대도시 부유층이 노동당에 표를 줬다”고 분석했다.
예상 밖의 총선 결과는 브렉시트 협상 파트너인 유럽에도 충격을 안겼다. 한 EU 관계자는 “보수당이 최소 30석을 더 획득할 것으로 예상했다. 모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반응은 특정 정당의 책임 정치 구현이 불가능한, 다시 말해 연합정부(연정) 구성이 필요한 ‘헝 의회(hung parliament)’가 현실화하면서 브렉시트의 궤도 수정도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연정을 어떻게 꾸릴지를 놓고 각 당의 이합집산이 시작된 분위기다. 기존보다33석 는 262석을 확보한 노동당은 보수성향의 제3당 스코틀랜드국민당(SNPㆍ35석), 자유민주당(12석)과 정책연합 형태의 ‘브렉시트 연정’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SNP는 일단 연정 가능성을 배제한 상태지만 두 당 모두 브렉시트는 예정대로 추진하되, EU 단일시장 권리는 유지하는 ‘소프트 브렉시트’를 선호한다. 일간 인디펜던트는 “소수 연정이 성사되면 새로운 브렉시트 협상안이 제2 국민투표에 부쳐질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메이 총리는 사퇴 압박에도 불구, 중도 우파 민주통일당(DUP)과 연대해 과반을 확보하고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킨다는 구상이다. 메이 총리는 9일 여왕과의 면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는 정부 구성을 하려 한다”라며 “확실성을 줄 수 있는 정부가 필요한 중요한 때에 보수당과 민주통일당만이 과반 확보로 확실성을 줄 수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협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당과 민주통일당(10석)의 의석을 합치면 과반보다 2석이 더 많게 된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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