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루 6시간 근무 스웨덴 아빠
4시부터 아이와 놀고 주말 밤엔 디제잉
“내 삶에 소중한 가치 하나도 안 놓쳐”
스웨덴 동쪽 섬 고틀란드의 주도 비스뷔에 사는 에릭 라르손(41)씨는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 겸 비디오 프로듀서로 일한다. 근무시간은 하루 여섯 시간.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세 시간 동안 일한 후 한 시간 점심시간을 갖고,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나머지 세 시간을 일하면 업무가 끝난다. 초등학교 0학년(스웨덴은 유아들의 초등 정규 교육과정 적응을 위해 0학년을 두고 있다)인 6세 딸 살마를 삼보(법적 보호를 받는 동거인) 관계인 직장동료와 함께 키우고 있는 그는 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시간과 거의 비슷하다. 알람이 울리는 오전 6시 45분부터 학교에 데려다 주는 8시까지 1시간 15분, 학교에서 픽업하는 오후 4시부터 책을 읽어주거나 노래를 불러주며 재우는 8시 30분까지 4시간 30분, 평일 하루 총 5시간 45분을 오롯이 딸과 함께 보내는 것이다.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그렇다고 그의 삶에 일과 가정만 있는 건 아니다. 팝뮤직 마니아인 그는 주말이면 격주로 동거인인 힐리아나 홀름그렌과 뮤직클럽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에서 DJ 겸 프로그래머로 일한다. 주중에는 언어를, 주말에는 음악을 다루는 삶이다. 매주 다른 테마를 정해 밴드를 섭외하고 음악을 선곡하며 중세 성곽도시 비스뷔에 라이브 음악의 열정을 불어넣고 있는 그는 “균형 잡힌 내 삶에 깊은 행복과 만족을 느낀다”고 말했다. “모두 6시간 근무제 덕분이죠. 일도 생활도 모두 즐거워졌어요.”
그는 10여 년 간 스웨덴 최초ㆍ최대 일간지인 아프톤블라데트와 그 인터넷방송에서 기자로 일하며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근무했던 이력이 있다. 그래서 이 극적인 변화의 기쁨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만끽하고 있다. 단지 기쁨만은 아니다. 고작 6시간 동안 8시간 이상 하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에게 닥친 충격 중 하나다.
#2 은행서 일하는 한국 엄마
정시퇴근 미안해 주말근무 자청해도
회사에선 찍히고 집에선 죄인… 늘 위축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 서울. 시중은행에서 10년째 일하는 한정희(32ㆍ가명)씨는 다섯 살 난 아들을 직장어린이집에 데리고 다닌다. 오전 7시쯤 일어나 눈도 못 뜬 애를 들쳐 업다시피 해 회사 1층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나면, 고작 오전 9시인데도 피로가 몰려온다. 아이는 한씨가 오후 7시 ‘칼퇴근’을 해도 총 10시간을 어린이집에 머물러야 하건만, 정시퇴근처럼 수행하기 어려운 미션도 없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저, 애기 데리러…”라고 입을 떼면 “정희씨 사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먼저 가”라고 말하는 직장동료들의 체념 어린 반응이 나온다.
“이해를 해준다기보다는 포기한 거죠. 저도 알아요. 늘 죄송하고 위축된 상태예요. 그렇다고 업무량이 줄어든 건 아니라 제 일은 그대로 쌓여있어 또 스트레스죠. 자료를 들고 와 집에서라도 처리하려고 하는데 솔직히 잘 안 돼요.” 대기업 중간 간부로 재직 중인 남편(38)은 빈번한 야근과 회식도 모자라 주말 근무까지 회사에 저당잡힌 터라 육아 분담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나마 비싼 전셋값을 감수하고 회사 근처로 이사한 후 사정이 좀 나아진 요새 얘기다. 직장어린이집은 대기 없이 바로 입소할 수 있다며 좋아했던 것도 잠시. 지하철로 1시간 걸리는 회사에 상사보다 먼저 도착해 앉아 있으려면 집에서 오전 7시 반에는 나와야 하는데, 이제 겨우 걸음마 하는 아기를 그 스케줄에 맞춰 데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회사 근처로 집을 옮기기 전까지는 다른 동네에 사시던 시어머니가 집에 와 아이를 깨워 먹인 후 회사까지 데려다 주시곤 했다. 늘 힘들었지만, 특히 겨울이면 아이를 ‘인수인계’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시어머니는 오지 않고, 출근 시간은 빠듯한데, 눈보라는 치고, 잠든 아이를 담요로 둘둘 싸 유모차에 눕힌 채 지하철역 앞에서 하염없이 시어머니 오시기만 기다리던 날들. 퇴근이라도 제때 해 아이를 하원시킬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밤 11시나 12시까지 야근하는 경우가 일주일이면 몇 번씩이나 반복됐다. 시어머니가 저녁에 다시 회사로 와 아이를 데려가는 생활을 2년 넘게 하면서 온 가족이 지쳐갔다.
“이렇게 여러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면서 내가 일을 계속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가 들 때도 많죠. 매일매일 힘들게 지내는데 늘 마음은 불편하고 몸은 고되고, 언제까지 이런 상황일지 지금도 막막해요. 퇴근과 동시에 육아가 시작되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눈감을 때까지 육아만 하다 보니 취미랄까, 자기계발이랄까, 개인시간이라고 할 만한 일상이 전혀 없어요. 단지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요?”
새로운 상상력과 담대한 용기를
대한민국에 내리쬐는 태양은 7시간 후면 스웨덴을 비춘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자와 스웨덴의 노동자는 평행우주를 살아간다. 동화적 필치로 묘사된 그들의 삶은 잠시 부러워하다 잊는 게 정신건강에 좋은 유토피아일 뿐. 제도와 문화가 다르고, 인구 규모와 부의 수준이 다르므로 우리가 따르기엔 시기상조라는 게 사회 통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만년 1, 2위를 다투는 최장노동시간을 불가피한 한국적 현실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 그 결과가 매년 최저치를 갱신하고 있는 출산율과 혼인율이다. 대한민국은 어느덧 개체들이 종(種)의 유지와 계승을 포기한 서식지가 되어 가고 있다.
촛불혁명이 일군 정권교체로 새로운 시대가 개막됐다. 다른 삶을 꿈꿀 새로운 상상력과 담대한 용기가 바야흐로 팽배한 때다. 일자리 대통령을 자임한 문재인 대통령의 주요 국정의제가 노동시간 단축이다. 지켜진 적 없는 주당 40시간의 법정 노동시간 준수는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연간 노동시간 2,113시간으로 독일 1,368시간에 비해 매년 4.2개월을 더 일하는 살인적 노동에 이제 그만 감속 페달을 밟으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고조되고 있다.
“서구 선진국들이 연간 노동시간을 1,800시간 이하로 감축했던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각국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만달러 수준이었어요. GDP 2만8,000달러인 우리나라에서 시기상조론을 펼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국, 베트남처럼 장시간 노동을 유지하는 산업화 초기 국가들과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산업화 시대 마인드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미 사회적 컨센서스는 있다고 봐요. 회사에 오래 있기보다는 근로시간을 효율화하고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게 거스를 수 없는 직장인들의 요구 아닙니까.” 그는 “문재인 정부가 핵심 국정의제로 노동시간 단축을 내세운 만큼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며 “이를 통해서만 대한민국이 밸류체인의 다음 단계로 올라설 수 있다”고 조언했다.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도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일자리를 나누는 넓은 의미의 워크 셰어링이 일자리 중심 복지국가의 유일한 경로라는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 기조로 접어들었고 옛날처럼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지는 국면이 아닌 이상, 장시간 노동이 불가피한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대대적으로 수술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3 노동시간 단축 방법론 논의할 때
근로시간 줄이면 생산성 높아져
저성장기 노동의 대변혁 필요
지금 이대로 생산적ㆍ효율적인가
은행원 한씨는 ‘칼퇴근의 아이콘’이라는 ‘불명예’를 지고 살면서도 회사에 10시간을 머문다. 12시간 이상 회사에서 보내는 직원들도 수두룩하다. 오후 7시면 회사에서 나와야 하는 한씨는 대신 주말에 자주 출근하는 편이다. 추가수당 상한액이 있어 다 보상받지도 못하는 공짜 휴일근로다. “미리 업무를 쳐내고 다음 일에 착수해 놓지 않으면 주중에 제대로 퇴근할 수가 없거든요. 주말이나 출장 때에는 지방에 사시는 친정 부모님이 올라와 아이를 돌봐주세요.”
하지만 이 같은 장시간 노동이 그만한 성과로 이어지는지는 회의적이다. “만성적 번아웃 상태이다 보니 집에 무겁게 서류뭉치들을 들고 와봐야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어요. 주변을 둘러보면 다 마찬가지예요. 회사에 탄력근무제도가 있긴 한데, 주어지는 기본 업무량을 감당할 수가 없어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요.” 무리한 출장 스케줄과 기계적인 당직ㆍ휴무 일정은 회사에 몸만 있을 뿐 업무는 안 되는 상태를 만들곤 한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OECD 34개국 중 22위다. 사업서비스업은 특히 낮아 제조업의 40% 수준으로 OECD 최하위다. 노동시간 단축은 이 낮은 생산성을 향상시킬 해법이기도 하다. 스웨덴 사무직 노조 TCO의 노동시간 조사관 마츠 에세뮈르 박사는 “노동시간 단축은 그 자체로 효율성을 만들어낸다”며 “법과 단체협약이 노동시간 단축을 강제하면 사용자나 관리자들은 업무가 느슨하게 이뤄지는 부분을 찾아 해법 모색에 나설 수밖에 없고, 노동자들도 마감시한 안에 업무를 종료하기 위해 최대 효율성을 작동시키는 시스템을 스스로 가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광고회사 OSS에서 일하는 라르손씨는 2016년 3월 15일 시작된 6시간 근무제가 얼마나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절감하고 있다. 8시간 근무에서 두 시간을 줄인 지 불과 1년 만에 회사의 광고 수주액은 50% 늘고, 수익은 20% 증가했다. 이 소규모 알짜기업이 이뤄낸 근로시간 단축의 기적은 스웨덴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일단 불필요한 회의를 싹 없앴어요. 스웨덴이 전통적으로 중시해 온 피카타임(커피타임)을 우리는 정례적으로 갖지 않아요.” 라르손씨의 상사인 율리아 벤델린 CEO는 “각자 일을 최대한 집중해 처리하고, 논의해야 할 중요사항은 한번에 모여 결정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창조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실은 두렵죠. 수익이 악화될까, 마감시한을 못 지킬까, 여러 가지 걱정이 드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일단 시도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용감하고, 담대하게요. 그 결과에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저녁 있는 삶의 조건, 신뢰와 책임
라르손씨의 업무가 타이트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업무시간 중 개인적 이메일이나 통화, 잡무를 아예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15분을 병원 다녀오는 데 썼다면 스스로 알아서 15분간 일을 더 한다. 회사와 직원 간의 신뢰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건 제 책임이죠.”(라르손) “저는 이 사람을 믿어요.”(벤델린)
노동복지 선진국의 누구를 만나든 듣게 되는 사회적 합의와 신뢰만큼 한국인들을 공허하고 낙담케 하는 것도 없다. 하지만 저녁이 있는 삶은 노동자와 사용자의 책임과 신뢰라는 두 바퀴로 굴러간다. 사용자는 노동자가 몇 시간을 일하는지 시시콜콜 관리감독하지 않고, 노동자는 짧은 노동시간 안에 최대한 생산성을 높이고 언제 어디서든 맡은 바 일을 완수한다. 오버타임이 상시적으로 발생한다면 사용자는 추가인력을 고용해야 하고, 일시적 오버타임 상황에서는 노동자가 기꺼이 연차휴가 보상을 대가로 추가근무에 임한다.
“한번도 상사한테 일이 너무 많지 않으냐, 제대로 진행되고 있느냐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은행원 한씨에게 일을 서둘러 마친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을 서둘러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지시만 있고 관리는 없기에 한국의 노동자들은 애써 최대 생산성을 낼 필요가 없다. 설렁설렁 너무 눈에 띄지 않게만 느슨히 일하는 게 한국식 생산성이고 효율성이다.
매일 출근해 8시간 이상 근무하는 삶. 고도성장기 제조업 중심의 사고방식이자 노동모델이다. 기술혁신과 정보통신 발달로 인해 노동방식의 대변혁이 불가피한 이 때,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은 유예할 수 없는 권리이자 소임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노동, 우리는 얼마나 준비돼 있을까.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여건과 방법은 직종마다, 업장마다 다르다. 그러나 그 차이가 단축 불가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 줄여야 한다는 대전제에 합의한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 방법론을 모색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과업이다.
행복한 노동으로의 변화는 실현가능하며, 실현되면 어떤 희열이 함께 오는지를 라르손씨는 증언한다. “저는 평생 음악에 대한 열정을 품고 살아왔어요. 딸 살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저한테 가장 중요한 시간이고요. 6시간만 일하는 덕분에 저는 이 소중한 것들을 모두 가질 수 있죠. 금요일 밤이면 뮤직클럽 행사 준비를 위해 살마를 데리고 ‘월 오브 사운드’에 가요. 클럽 무대를 준비할 때 살마는 뛰어다니며 노는 걸 정말 좋아해요.” 이런 그에게 직장은 고역일 리 없다. 아이스크림 포장컵을 디자인하고 광고할 때, 딸과 함께 바닷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놀았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 도리가 없으며, 식당 동영상 광고에 음악을 넣으며 뮤직클럽의 뜨거운 열기를 입히지 않기가 힘들다. 일과 가정과 여가가 황금의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삶이다.
스톡홀름·비스뷔=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서울=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현지 취재를 통해 행복한 노동의 대안을 모색하는 창간특집기획 ‘잃어버린 저녁을 찾아서’는 8주간 매주 금요일자에 게재됩니다.
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