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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지구' 주민은 어떻게 남한 국민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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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지구' 주민은 어떻게 남한 국민이 됐나

입력
2017.06.0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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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수복지구

한모니까 지음

푸른역사 발행ㆍ536쪽ㆍ3만5,000원

1946년 10월 17일 철원 농민들이 '김일성 장군' 사진을 앞세워 농업현물세제를 부과하기도 전에 일단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있다. '일제 신민'과 '공화국 인민'은 그렇게 다른 듯 겹친다. 푸른역사 제공
1946년 10월 17일 철원 농민들이 '김일성 장군' 사진을 앞세워 농업현물세제를 부과하기도 전에 일단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있다. '일제 신민'과 '공화국 인민'은 그렇게 다른 듯 겹친다. 푸른역사 제공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악전고투 국회 입성기’는 유명하다. 말 잘하고 똑똑한, 유망한 정치신인으로 꼽혔건만 자유당의 방해공작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매번 떨어진다. 4ㆍ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1961년 5월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마침내 배지를 가슴에 단다. 하지만 곧이어 터진 5ㆍ16쿠데타로 의원직을 다시 잃는다. 5ㆍ16 쿠데타의 주역은 바로, 1958년 해도 너무한 자유당의 악랄한 부정선거를 하소연하러 찾아갔었으나 만남이 성사되지 못한 박정희 소장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민정이양 뒤에야 비로소 목포에서 배지를 제대로 단다.

참으로 기나긴 도전인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정치적 욕망이 가득했던 목포의 청년사업가가 고향에서 낙선한 뒤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곳이 강원 인제라는 점이다. 그 스스로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향”이라고 말했던 곳에서 출마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수복지구’라는 표현에 있다. 아무리 유망하다 하나, 그래 봤자 당시의 김대중은 정치신인일 뿐. 기존 거물이 있던 곳을 뚫고 들어가긴 어려웠다. 인제는 38선 분할 때는 대부분 북한에 속했으나, 휴전선으로 다시 나뉘어졌을 때는 대부분이 남한 쪽으로 넘어왔다. 북에 넘어갔다 남으로 돌아온 수복지구 인제는 좋게 말해 ‘새로운 기회의 땅’, 나쁘게 말하자면 ‘무주공산’이었다.

‘한국전쟁과 수복지구’는 바로 이 인제를 중심으로 수복지구라는 회색공간에 대한 연구다. 김 전 대통령 입장에서 사실 별도의 노림수도 있었다. ‘북진통일’ 운운하다 한강 다리 끊고 도망친 게 자유당 정권이었다. 그러니 “군인과 군속, 그 가족이 유권자의 80% 이상”이었던 이 지역이라면, 자유당 대신 야당을 지지할 것이라 믿었다. 어찌 보면 이 책은, 김 전 대통령의 이런 기대가 어떻게 깨졌는가에 대한, 인제 지역에 대한 민속지적 보고서이기도 하다.

책의 줄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지역 사람들 얘기다. 인제 지역 사람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일제의 신민(subject)에서 북한의 인민(people)으로, 다시 유엔 군정의 주민(population)을 거쳐 남한의 국민(nation)으로 변신해나가야 했다. 주민들은 충성심을 통해 내가 당신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아니 사실 증명이 별로 힘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일제의 영웅, 북한의 영웅, 군정의 영웅, 남한의 영웅은 완전히 다른 이데올로기로 호명하는 듯 하지만, 실제론 별 차이가 없다. 폭력적 국가 체제가 요구하는 인물상이란, 대개 엇비슷하기 마련이다. 바뀌는 건 피지배자의 얼굴이 아니라 지배자의 얼굴이었을 뿐이다.

경기 연천군에서 벌어진 미군정 반대 시위 운동. 이런 곳에 충실히 얼굴을 내미는 것은 '공화국 인민'의 의무다. 푸른역사 제공.
경기 연천군에서 벌어진 미군정 반대 시위 운동. 이런 곳에 충실히 얼굴을 내미는 것은 '공화국 인민'의 의무다. 푸른역사 제공.
경기 포천, 강원 철원 일대 행정권이 미군에서 한국 정부로 넘어가는 이양식장에서 주민들이 '북진통일', '수복재건'을 내걸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또한 '남한의 국민'이 겪어야 할 통과의례다. 푸른역사 제공
경기 포천, 강원 철원 일대 행정권이 미군에서 한국 정부로 넘어가는 이양식장에서 주민들이 '북진통일', '수복재건'을 내걸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또한 '남한의 국민'이 겪어야 할 통과의례다. 푸른역사 제공

여기에도 두 가지 양념이 있다. 북한의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은 급격하게, 남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철저하게 이뤄졌다는, 일종의 ‘신화’가 있다. 이 ‘철저하게’가 긍정적인 의미인지, 부정적인 의미인지는 평가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허나 저자는 인제 지역 연구를 통해 이 두 과정이 실제로는 굉장히 완만하게, 타협적으로 진행됐다고 설명한다. 특히 토지개혁은 지주들을 주로 겨냥했을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되레 중농(中農)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뒀다.

또 한가지 양념은 유엔 군정기의 존재다. 한국전쟁 중 남한이 차지했으면 남한 땅이지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38선 이남에서만 합법정부였다. 38선 이북 지역, 그러니까 전쟁을 통해 점령한 지역에 대해 유엔은 남한 정부의 점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서 인제 지역은 남한 정부가 아니라 유엔군의 관리 대상이 됐다. 유엔군은 정전협정을 맺은 뒤 1년 뒤인 1954년 11월 17일에야 수복지구의 행정권을 남한 정부에다 넘겼다.

역사교과서 문제나 색깔론에 종종 등장하는,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 논란에 비춰보면 실소가 난다. 그러나 마냥 웃고만 말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리 적어뒀다. “북한의 유사시 혹은 통일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북한 급변사태 때 동북공정 때문에 중국이 북한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주장보다 훨씬 더 현실에 가까운 말이다.

책의 두 번째 큰 줄기는, 그렇다면 남한은 ‘북한의 인제’을 어떻게 접수했느냐다. 저자는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체제 전환이라 하면 대개 1980년대 동유럽을 떠올리는데, 오히려 인제의 사례가 더 앞선 것이라 지적한다. 미국도 인제를 “북한 행정과 공산주의 교육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체제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지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간주해 사회학자 등을 투입해 현지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 말인즉슨, 우리도 통일을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인제의 사례를 전반적으로 한번 따져 볼 필요는 있다는 의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일제 따라 “공산주의 박멸”을 외치다 북한 따라 “반일ㆍ반제”를 외치다 다시 남한 따라 “반공”을 외쳐야 했던 해당 지역 주민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 철저히 침묵하는 것”, 아니면 “더욱 철저하게 국민으로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속이야 어쨌건, 과거야 어쨌건 ‘남한 국민’으로의 탄생은 그러해야만 했다. 자유당은 인심이 잃었을 것이라 믿었던 정치인 김대중은, 이 ‘남한 국민의 탄생’ 앞에 무릎을 꿇었을 지 모르겠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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