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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 연극과 영화의 시간은 다르다

입력
2017.06.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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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설은 과거형으로 쓰여질 수밖에 없다. 소설 속 내용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시간에 의해 편집된 이야기다. 현재형처럼 보이는 표현,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죽을 만큼 그를 사랑한다”는 표현 역시 말하는 사람의 과거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글 속에서 ‘현재’란 불가능한 시간이다. 무엇인가 기록한다는 것은 현재의 사건을 과거의 시간으로 밀어 넣는 것이고, 무엇인가 읽는다는 것은 편집된 과거의 시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연극과 영화는 종이 위에 적힌 글(희곡과 시나리오)에서 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다룬다는 차이점도 있다. 살아 있는 배우들이 내 눈앞에서 이야기를 뿜어내는 것이 연극이라면, 배우들의 녹화된 이미지를 통해 편집된 이야기를 체험하는 것이 영화다. 연극은 새로운 일들이 발생할 여지가 있지만, 영화 속 세계는 진작에 완결된 세상이다. 어떤 사람은 연극에서 ‘생생한 기운’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이미 편집된 영화 속 세계’에서 안전함을 느낀다. 무대 위의 배우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연극 무대의 장점이라면, 오랜 시간 동안 벌어진 사건을 빠른 시간 내에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영화의 장점일 것이다.

영화 '대학살의 신'의 두 부부는 아이들 다툼 때문에 만나 어른답게 대화하다 결국 자신들 마음 속에 감춰진 유치함을 드러내게 된다.
영화 '대학살의 신'의 두 부부는 아이들 다툼 때문에 만나 어른답게 대화하다 결국 자신들 마음 속에 감춰진 유치함을 드러내게 된다.

영화 ‘대학살의 신’(2011)은 명백하게 연극적이다. 또한 영화적이기도 하다. 야스미나 레자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본 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곧바로 영화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야심은 간단했다. 연극을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데려오는 것. 80분 동안 펼쳐지는 ‘리얼 타임’ 이야기를 위해 감독은 극의 주무대가 되는 아파트 세트에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 연극을 스크린으로 고스란히 가져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폴란스키 감독은 ‘대학살의 신’을 통해 연극과 영화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연극과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11살 재커리는 친구들과 다투다가 막대기를 휘둘러 이턴의 앞니 두 개를 부러뜨리게 된다. 아이들의 싸움을 해결하고자 모인 두 부부, 처음에는 이성적이던 사람들이 점점 아이처럼 변하는 모습을 연극과 영화는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영화는 아주 멀리서 아이들이 싸우는 장면을 보여준다. 너무 멀어서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그저 ‘저런 일이 있었구나’ 싶은 풍경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어른들의 이상한 싸움이 끝난 후 아이들의 모습을 멀리서 보여준다. 아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함께 놀고 있다.

영화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바로 거리 두기다. 어떤 때는 인물에게 바싹 다가가서 땀구멍 하나까지 자세히 보여줄 수 있고, 어떤 때는 멀찍이 떨어져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넓게 보여줄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하찮은지 카메라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극 중 주인공들이 디저트 ‘코블러(Cobbler)’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은 카메라의 시선과 정반대의 감각을 보여준다. 남편 마이클(존 C. 레일리)이 아내 페넬로피(조디 포스터)에게 묻는다. 코블러가 케이크인지 파이인지. 페넬로피가 대답한다. “파이는 아니지. 바닥에 크러스트가 없으니.” 어른들은 바닥에 크러스트가 있는 걸 파이라고 부르고, 바닥에 크러스트가 없으면 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소한 분류에 집착하고, 상대방 말의 꼬투리를 붙들고 싸우는 네 명의 어른. 연극적인 대사와 카메라의 거리를 함께 작동시키면서, 감독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영화 '클로저'는 서로 사랑하고 배신하는 네 남녀의 엇갈린 관계를 통해 인간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들여다 본다.
영화 '클로저'는 서로 사랑하고 배신하는 네 남녀의 엇갈린 관계를 통해 인간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들여다 본다.

‘대학살의 신’과 마찬가지로 영화 ‘클로저’(2004) 역시 연극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다. 주인공이 네 명이라는 것이다. ‘클로저’는 댄(주드 로), 안나(줄리아 로버츠), 알리스(내털리 포트먼), 래리(클라이브 오언)의 얽히고설키는 사랑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다. 네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연극으로 보았더라면 그들의 사랑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감정이 들었을 테지만 영화라는 장르는 생생한 인간을 보여주는 대신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배우들은 하나의 전형을 연기하고 있다. 우리는 댄 같은 사람을 한 명쯤 알고 있고, 안나, 알리스, 래리 같은 사람을 한 명쯤 알고 있다. 우리는 네 사람이 벌이고 있는 사랑의 디테일을 생각하는 대신,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예스터데이’에는 비틀스의 명곡 ‘예스터데이’를 번안해서 부르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번안한 가사가 의미심장하다. “어제는/ 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우리는 오늘을 살기 때문에 어제가 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으며 산다. 아마도 영화가 가장 잘 하는 일 중 하나가 시간의 감각을 일깨워준다는 점일 것이다. 영화는 완료된 사건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여러 각도에서, 여러 시간에서, 여러 넓이에서 보여주는 신비한 이야기꾼이다.

김중혁 소설가·B tv ‘영화당’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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