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바구니 든 사람을 거리에서 마주쳐도 놀라지 말자. 바구니가 아니라 ‘라탄백’일 테니까.
라탄(Rattan)은 덥고 건조한 기후에서 자라는 덩굴식물이다. 줄기로 바구니를 짜거나 가구를 만든다. 커다란 라탄백은 휴양지의 상징이다. 리조트 객실과 해변, 수영장을 오갈 때 잡동사니를 담아 다니는 바로 그 가방, 라탄백이 도시로 나왔다.
왜 하필 바구니 같은 가방이냐고? 싸고, 질기고, 가볍고, 물에 잘 젖지 않으니까. 무겁고 비싼 가죽 가방도, 너도나도 들고 다니는 에코백도 지겨우니까. 패션의 완성은 자신감이다. 시골 장터를 다니는 할아버지가 닭을 넣으면 바구니가 되고, 내가 멋지게 들면 패션이 된다.
도시로 나온 ‘라탄백’
라탄백이 패션계에 처음 등장한 건 1950년대다. 세계 경제가 초토화했으니 실용성을 따진 게 당연했다. 영국 가수이자 배우인 제인 버킨은 라탄백 마니아였다. 히피인 그의 1960년대 사진엔 라탄백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드레스를 입고도 라탄백을 들었다. 라탄백을 든 버킨의 모습은 2017년의 패션 잡지에서 튀어나왔다 해도 믿을 정도로 무심한 듯 시크하다. 버킨에게 라탄백은 그저 멋이 아니었다. 빨래 바구니를 닮은 원통형 라탄백에 아이들 물건을 잔뜩 넣고 다녔다. 그런 버킨에게 영감을 받아 만든 게 그 유명한 에르메스의 버킨백이다. 과시적 소비의 상징인 버킨백이 기저귀 가방에서 나왔다니. 정작 버킨은 터무니없이 비싼 버킨백을 혐오해 라탄백만 들고 다녔다고 한다.
요즘도 라탄백은 알렉사 청, 잔느 다마스, 린드라 메딘 등 패션 철학이 확고한 패셔니스타의 아이템이다. “나는 바구니처럼 보이는 가방을 들어도 멋있다”는 빛나는 자신감. 올해 봄ㆍ여름 시즌에는 발렌시아가, 로에베, 사카이 등 고가 패션 하우스와 패스트 패션 브랜드가 라탄백을 예년보다 풍성하게 내놓았다. ‘자연의, 자연을 위한, 자연에 의한’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각 잡힌 모양에 가죽이나 천을 덧붙인 디자인으로 리조트 아이템이라는 편견을 덜어 낸 게 올여름 라탄백의 특징이다. 라탄보다 부드러운 왕골로 만든 백, 대나무로 만든 뱀부백도 나왔다. 서울 명동 자라 매장에서 라탄백을 고르는 30대 여성들을 만났다. “가볍고 독특하다. 생각보다 촉감이 좋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손에 부드럽게 감긴다. 엄마가 ‘이제 바구니까지 사들이니?’ 하지 않을지 걱정되긴 한다.”
천연 소재인 라탄백은 자연스러운 미니멀리즘 코디에 어울린다.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는 “라탄백은 선글라스, 플랫 슈즈, 샌들 같은 소품, 청, 린넨 같은 편안하고 부드러운 소재와 잘 맞는다”며 “오래도록 아끼며 들기보다는 ‘지금 이 계절, 이 장소’를 만끽하려 택하는 시즌 아이템”이라고 했다. “한껏 차려 입은 정장에 라탄백을 드는 건 너무 나가는 것”이라고도 했다. 라탄백 손잡이에 스카프를 감아 보자. 조금 더 점잖아진다. 라탄백이 하늘하늘한 원피스에만 어울리는 청순 패션 아이템이라는 고정 관념도 버리자. 재킷과도 궁합이 꽤 괜찮다.
‘과시적 소비 패션’의 퇴조
“패션을 죽이는 건 망할 X의 브랜드 로고다. 그건 패션이 아니라 상표다”(알렉산더 맥퀸), “고급 제품일수록 편해야 한다. 편하지 않으면 고급이 아니다”(코코 샤넬), “여성은 편안한 옷을 입었을 때 가장 섹시하다”(베라 왕), “당신을 스스로 정의하라. 옷 입는 방식으로 표현하려 하는 게 무엇인지 결정하라”(지아니 베르사체)
거장들의 패션 철학이다. 이름도 괴상한 ‘명품’이라는 딱지를 붙여 우리의 통장을 털어간 그들이 실은 ‘실용’을 신봉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천박한 ‘명품 신화’는 역시나 날조된 것이었다. 그 비밀을 알아챈 사람들이 최근 몇 년 사이 ‘명품백’을 버리기 시작했다. 내가 편하면, 내 눈에 예뻐 보이면 그만이므로. 손에 넣는 순간 허무감이 밀려드는 허상 같은 가방에 수백만원을 지불하는 건 너무나 허무하므로. 가방 가격이 품질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으므로. 비행기 표, 소파, 냄비, 에스프레소 머신, 책, 오디오… 보다 오래가는 행복에 쓸 돈도 모자라므로.
가방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속옷 브랜드 ‘비비안’이 최근 실시한 구매 행태 조사에서 여성들은 ‘브래지어를 살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으로 ‘착용감과 활동성(35%)’을 제일 많이 꼽았다. ‘볼륨과 보디 라인(28%)’ ‘가격(13%)’은 뒤로 밀렸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있어 보이는 기능’을 강조하는 브래지어를 입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뜻이다.
패션 디자이너 지춘희 미스지컬렉션 대표는 “사람들이 이제서야 뭘 좀 알고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비싼 아이템은 돈이 있으면 누구나 살 수 있지만, 나만의 것, 나의 패션 정체성은 결국 내가 배우고 찾아 나서야 한다”고 했다.
라탄백과 에코백의 등장은 명품백이 자리를 비워 줬기에 가능했다. 라탄백은 비싸지 않다. 브랜드 값을 치를 생각이 없다면, 몇만원이면 구할 수 있다. 가방을 모시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때도 잘 타지 않는다. 바닥에 툭 내려 놓아도 마음이 편하다. 물을 흘려도 슥 닦으면 그만이다. 고통받았을 가여운 동물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가볍다.
“아무리 그래도 바구니인데… 돗자리랑도 비슷하고…” 망설여진다면 굳이 도전하지 않아도 된다. 유행은 유행일 뿐이니까.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윤한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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