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동두천 미군기지 주변의 쇠락한 거리. 또각또각 걸음소리가 나지막이 울린다.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다가오고, 관객은 여인에게 이끌려 허름한 여인숙에 다다른다. 깜박거리는 형광등 아래로 널브러진 옷가지와 흥건한 핏자국. 이곳은 여인의 방이다.
관객을 실제 같은 가상 공간으로 데려다 놓는 가상현실(VR) 단편영화 ‘동두천’은 참혹한 비극의 현장을 ‘체험’하게 만든다. 1992년 동두천 기지촌에서 벌어진 미군 범죄 ‘윤금이 살해 사건’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담았다. ‘동두천’은 7일까지 열리는 제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소개됐다.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신촌의 한 멀티플렉스에서 6일 만난 김진아(44) 감독은 “피해자의 여정을 똑같이 되짚으며 시간을 복원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미국 유학 시절 6년간 촬영한 다큐멘터리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2002)와 실험적 극영화 ‘그 집 앞’(2003)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배우 하정우와 미국 배우 베라 파미가가 출연한 한미합작 영화 ‘두 번째 사랑’(2007)으로 한국 관객에 친숙하다. 2009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활약했고, 미국 하버드대 시각예술환경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영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번에 선보인 신작 ‘동두천’은 김 감독이 서울대 미대에 다니던 시절부터 품고 있던 주제였다. 사건 당시 대학 1학년이었다. 여성 인권에 무지하던 시대에 ‘윤금이 살해 사건’은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다. 조사과정에서 드러난 한미 관계의 불평등을 개선하라는 요구도 빗발쳤다. “당시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이 사진으로 공개됐는데 가슴이 후벼 파듯 아팠어요. 목적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고민했고 분노했죠.” 1999년부터 극영화를 구상했지만 폭력의 재현이 피해자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주저하다가 VR이라는 매체를 만나 오랜 염원을 풀었다.
“VR 안에서 관객은 시선은 있으나 몸은 없기 때문에 굉장히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돼요. 온몸의 감각으로 현실을 느끼게 되죠. 바퀴벌레 입장에서 발에 밟히는 경험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VR은 사회적 메시지를 다루기 좋은 매체이기도 합니다. 시리아 내전을 기사와 사진으로만 봐서는 제대로 알 수가 없지만, VR을 통해 눈 앞에 총알이 날아다니는 체험을 하면 그 공포를 느낄 수 있죠. 전 세계에서 비극이 끊이지 않는 건, 타인의 고통을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점에서 VR은 획기적인 소통 매체예요.”
김 감독은 다큐멘터리와 상업영화, 실험적 미디어아트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유화 전문과 수채화 전문으로 구분 짓지 않듯 주제에 맞는 매체를 선택할 뿐”이라고 했다. 그림을 전공한 그가 영상예술에 빠져든 것도 “예술이 대중과 소통하며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올해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역대 최연소 감독상을 수상한 데이미언 셔젤(‘위플래쉬’ ‘라라랜드’)의 하버드대 스승이기도 하다. 그의 졸업작품을 지도했다. ‘위플래쉬’가 단편영화로 먼저 만들어져 선댄스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 특강을 위해 수업에 그를 초청하기도 했다. “‘위플래쉬’가 순조롭게 만들어진 게 아닌 걸 아니까 더욱 더 자랑스럽지요. 하지만 이런 말조차 누가 될까 걱정스럽네요.”
이젠 스승이 연출에 복귀할 차례다. 김 감독은 강단에 서는 틈틈이 여성 중심의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를 준비해 왔다. 시나리오는 완성됐고 올해 말에서 내년 초 크랭크인을 계획하고 있다. ‘동두천’을 확장해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VR 시리즈도 꾸준히 제작할 생각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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