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사라지는 연인들의 ‘낭만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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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사라지는 연인들의 ‘낭만 극장’

입력
2017.06.0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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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카 시대 데이트코스로 인기

2000년대 중반까지 60여곳 성업

멀티플렉스ㆍ개발 열풍에 밀려

절반 사라지고 간신히 명맥 유지

서울 남산 자동차극장의 모습. 배우한 기자bwh3140@hankookilbo.com
지난 1일 서울 중구 장충동에 위치한 남산 자동차극장. 영화 상영 직전이지만 차량들이 스크린을 향해 드문드문 서 있다.
서울 남산 자동차극장이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낮에 주차장으로 쓰이는데 빈 공간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자동차가 꽉 차있다.
서울 중구 장충동에 위치한 남산 자동차극장의 차 안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

지난 1일 서울 중구 장충동에 위치한 남산 자동차전용극장. 오후 8시 20분 예정인 영화 상영 10분 전이지만, 최대 150대가 들어올 수 있는 자동차극장에 입장한 차량은 8대에 불과했다. 기자가 타고 있는 차량과 20대로 보이는 젊은 연인들이 탄 차량 5대, 노부부가 탄 차량 2대 등이었다.

이곳을 찾은 김석호(59)씨는 “젊었을 때 아내와 자동차극장에서 데이트하던 시절이 떠올라 오랜만에 왔다”며 “당시에는 자동차극장에 입장하는 데만도 20분이 넘게 걸렸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극장에 차들이 워낙 드물다 보니 관리요원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며 영화 상영에 방해되지 않도록 차들의 전조등을 일일이 가려주는 친절함을 베풀고 있었고, 관람객들에게 영화 관람 시 주의사항을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차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는 관람객들과는 가벼운 잡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남산 자동차극장 관계자는 “2000년대 중반까지는 하루 500대까지 들어왔지만 지금은 차량 10대를 채우기가 힘들다”며 “밤에는 자동차극장으로 낮에는 유료 주차장으로 활용해 수익을 맞춰나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한때 둘만의 공간에서 오붓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얻었던 자동차전용극장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1980년대 우리나라도 ‘마이카’(My car) 시대를 맞으면서 자동차극장이 2000년대 중반까지 전국 60곳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쇼핑몰과 레스토랑, 초대형 영화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 등장과 땅값 상승, 개발 열풍 등에 치여 지금 남아 있는 자동차극장은 전국 26곳으로 절반 넘게 사라졌다. 업계 관계자는 “서울에서는 잠실 자동차극장만이 그나마 2개 관을 운영하며 수익을 내고 있다”며 “나머지 자동차극장들은 언제 폐관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극장은 1994년 4월 23일 경기도 포천의 베어스타운에서 문을 열었다. 당시 가로 12m, 세로 5m의 대형 스크린이 설치됐고 자동차 오디오와 FM 주파수를 활용한 특수음향 시스템이 장착된 자동차극장에선 홍콩영화 ‘천장지구 2’가 상영됐다. 300여대의 차량에 1,000여명의 관람객들이 참석해 자동차 안에서 영화를 보는 체험에 신기해했다. 강혜숙(49ㆍ주부)씨는 “1990년대만 해도 평범한 서민들이 자가용 자동차를 구입하는 건 쉽지 않았다”며 “자동차극장 관람은 일종의 호화 데이트로 여겨졌다”고 회상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남산 자동차극장을 비롯해 경기도 용인과 안산, 경북 경주 등 전국에서 자동차 극장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1995년 경주 보문 자동차극장은 당시 아시아 최대규모 2만3,140㎡(약 7,000평) 부지에서 문을 열기도 했다.

특히 자동차극장은 데이트 장소가 지금처럼 많지 않던 시절에 연인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둘만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종의 ‘사랑의 도피처’였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중반에는 실내자동차극장까지 성행하기도 했다. 남녀가 탄 자동차 한 대가 가로 3m, 세로 1m 넓이의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가 차 앞쪽에 높인 스크린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실내자동차극장은 시설 기준상 사업등록을 할 수 없는 무허가인 데다 퇴폐영업 가능성이 제기돼 정부의 엄격한 단속을 받았다.

자동차극장이 주던 낭만과 여유로움을 잊지 못하는 이들은 지금도 극장을 찾고 있다. 자동차극장에서 만난 강인영(45)씨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실내 영화관에 가면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느라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며 “차라리 아이들을 데리고 자동차극장에 오면 차 안에서 저녁도 먹고 영화를 보면서 아이들과 오순도순 얘기도 나눌 수 있어 가끔 가족과 함께 온다”고 말했다. 여자친구와 함께 자동차극장을 찾은 유인한(27)씨는 “특별한 데이트코스를 찾던 중 자동차극장이 있어 호기심에 처음 와봤다”며 “자동차극장에서 연인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게 이렇게 낭만적인 일인지 몰랐다”고 소감을 말했다.

최근 자동차극장은 부동산 개발 붐을 타고 땅값이 크게 오르면서 점차 폐관 직전까지 몰리고 있다. 실제 서울에서 수익을 내는 잠실 자동차극장의 경우도 코엑스에서 잠실종합운동장에 이르는 국제교류복합지구 개발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언제 폐관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부산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자동차극장인 부산시네마도 지난해 임대계약 종료 통보를 받고서 문을 닫았다. 총 1만1,107㎡ 부지에 차량 198대의 주차공간을 갖춘 대규모 자동차극장이었다. 해당 업체는 대체 용지를 물색했지만, 크게 오른 땅값에 마땅한 부지를 찾지 못해 결국 영업 중단을 택했다. 또한 전남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극장이었던 패밀리랜드 자동차극장도 지난해 비슷한 이유로 문을 닫았다.

자동차극장의 퇴장은 사실 우리나라 극장 업계 전반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땅값 상승과 함께 복합 쇼핑몰을 갖춘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자동차극장뿐 아니라 일반 극장도 잇따라 폐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08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영화관 단성사다. 우리나라 최고(最古) 영화관으로 명성을 높였던 단성사는 멀티플렉스 등장과 DVD 판매 등으로 관람객이 줄면서 지난 2008년 부도 처리됐다. 해당 건물을 인수한 모자 전문기업인 영안모자는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는 “1907년 문을 연 단성사는 국내 영화의 산실과도 같은 곳”이라면서 “단성사 이후 중앙극장, 명보극장, 피카디리 등이 생겼지만 이들 극장 대다수도 이미 사라졌거나, 앞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2017-06-06(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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