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자율방범ㆍ쓰레기 적극 수거
공부방ㆍ도서관ㆍ경로당으로도 이용
공원에 스피커 달고 클래식 틀고
골목에 LED 조명 등 환경 개선
큰 비용 안 들이고 범죄예방 효과
“전에는 누가 쫓아올까 조급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종종걸음으로 걷던 밤 거리가 이젠 여유로워졌어요.”
5일 작은 공장과 주택이 뒤섞여 있어 낮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밤에는 텅 비어 으슥했던 서울 금천구 가산동. 지난해 서울시가 이 동네에 범죄예방디자인(CPTEDㆍ셉테드)을 입히면서 밤길 다니기가 무서웠던 이곳이 ‘안전 마을’로 바뀌었다. 그 중심에는 주민 공유공간 ‘지킴마루’가 있다. 봉암빌라 지하의 버려졌던 지하주차장에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동네의 골목대장이 되면서다.
20년째 봉암빌라에 살고 있는 최현남(63)씨는 “지킴마루가 길가에 자리잡고 있다보니 믿을만한 구석이 생겨 밤에도 편안하게 동네를 배회할 수 있게 됐다”며 “재개발이 무산되면서 낡고 방치됐던 동네에 주민들이 애착을 갖고 가꿔나가면서 동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고 말했다. 최씨를 비롯한 봉암빌라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운영위원회를 꾸렸다. 일주일에 닷새를 늦은 밤 안전한 귀갓길을 위한 자율 방범활동에 나서고, 동트기 전 동네 쓰레기를 줍는 마을정화에도 두 팔을 걷어붙였다. 처음에는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양의 쓰레기가 나왔지만 이제는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분리수거에 동참할 정도로 동네가 깨끗해졌다. 뿐만 아니라 지킴마루는 동네 아이들을 위한 방과 후 공부방, 작은 도서관, 경로당 등으로 이용되면서 주민들이 서로 어울리고 의지하는 공간이 됐다.
이처럼 방치된 공간을 주민이 활용하도록 하는 것은 범죄예방디자인의 한 기법이다. 범죄예방디자인은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환경적 요인을 찾아내 이를 개선하고 범죄인의 접근을 차단해 범죄기회를 줄이는 공공디자인이다. 깨진 유리창 같은 사소한 허점도 그대로 두면 더 큰 병리로 진행된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에 기대고 있다. 지하철 벽면의 낙서를 지운 것만으로 범죄가 줄었던 미국 뉴욕 지하철 사례는 유명하다. 서울시도 2012년 소위 우범지대였던 마포구 염리동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모두 31곳에 범죄예방디자인을 도입했다. 실제 초기 이 디자인이 조성된 용산구 용산2가동은 2년 만에 강도, 성폭행 같은 범죄가 22.1%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깨진 유리창을 고치는 데는 큰 비용이 들지 않는 것도 이점이다. 이를테면 가산동에는 처음으로 사운드를 활용해 범죄심리를 위축시키는 범죄예방디자인이 적용됐다. 평소 비행의 온상이던 으슥한 동네 공원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클래식 음악을 틀어 동네 주민에게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면서 동시에 범죄심리 역시 위축시키는 효과를 내도록 한 것이다. 어둡거나 막다른 길에 들어서면 강아지 캐릭터 ‘가산이’의 얼굴과 ‘안전한 동네입니다’라는 문구가 바닥에 비춰지는 고보조명이 설치됐다. 가로등이 없던 골목에는 LED 조명띠로 환하게 밝히고, 스피커에서 ‘멍멍’ 짖는 소리가 나오도록 했다. 뒤 따라오는 사람을 확인할 수 있도록 현관문에 ‘미러시트’를 붙이거나 필로티 주차장에 숨어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도록 벽면에 노란 형광색의 반사띠를 설치하는 등의 세심한 배려도 주민들의 반응이 좋았다.
시 관계자는 “어둡고 방치된 마을 공간을 정비하는 건 애초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곳을 없애준다는 차원에서 생각보다 큰 범죄예방 효과를 낸다”며 “주민들간 결속력을 높여 마을공동체를 회복하면 무관심을 없애 범죄 발생률이 줄고, 자율적인 방범활동 거점으로 운영되면서 불안심리도 낮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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