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계란에 영혼이 있다면? 바위를 향해 온 몸을 내던진 계란은, 그 찰나에 어떤 생각을 할까? 온 몸으로 부딪쳐도 상처 하나 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 무자비한 철벽과 맞서야 하는 그 비장한 기분이란…
이런 생각이 든 건 커제(柯洁)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보면서였다. 어느덧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신계’의 수준에 올라 버린 인공지능과 자웅을 겨뤘던 커제 9단은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흔들릴 영혼 자체가 없는 완벽한 기계를 향해 “이길 수 있는 한 톨의 희망도 갖기 어려웠다”는 말을 남겼다.
사실 커제도 “오직 나만이 알파고를 이길 수 있다”고 큰 소리는 쳤지만 패배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세돌 9단의 처참한 패배를 보면서, 이세돌이 맞섰던 알파고보다 지금 알파고가 몇 배나 더 발전된 인공지능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바위에 부딪치는 계란의 역할을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엔 질 것을 알면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싸움들이 있다. 커제는 인간 최고수의 자존심을 걸었을 뿐이지만, 뻔한 싸움에 하나뿐인 목숨을 건 이들도 있다. 작년 9월, 농민 백남기씨가 숨을 거뒀다.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집회 도중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진 뒤, 317일 동안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던 그는 결국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백씨의 인생은 언제나 바위에 부딪치는 계란과 같은, 치열한 삶이었다. 대학시절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시위를 하다 제적을 당했고, 1980년 ‘서울의 봄’ 기간 중에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5ㆍ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계엄군에 체포되기도 했다. 죽음으로 이어진 마지막 부딪침(민중총궐기) 역시 박근혜 정권이라는 철벽에, 그를 비롯한 약자들이 온몸을 내던진 투쟁이었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비정규직 스태프를 착취해야만 하는 구조를 비관하면서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고(故) 이한빛 PD 앞에도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죽음 전에도, 죽음 후에도 그를 죽음으로 내 몰았던 불합리한 노동 구조는 ‘대지에 뿌리를 깊숙하게 박은’ 바위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이 불합리함이 쉽게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새 대통령의 비정규직 대책에 조직적 저항을 준비하는 기득권 움직임이 멈추지 않는 것만 봐도, 수많은 계란의 목숨을 삼킨 노동차별의 바위는 웬만한 공격에 부서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이제야 반성하지만, 나는 그리고 한국의 언론은 백남기씨가 쓰러졌을 때도 이한빛 PD가 삶을 스스로 포기했을 때도, 그들이 왜 쓰러졌는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백씨가 긴 잠을 멈추고 숨을 거둔 뒤에야, 이 PD 가족들이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사람들이 동참하고서야 뒤늦게 눈을 뜨고 귀를 열었다.
진보했다는 인간의 역사는 몸이 부서질 게 뻔한 걸 알면서도, 또 질 것이 뻔한 싸움임을 인지하면서도, 바위에 몸을 부딪친 ‘계란들’의 덕을 크게 입고 있다. 바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계란들의 거룩한 희생은 언젠가 빛을 보게 되고,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우리가, 사회가, 언론이, 그리고 정부가 초개처럼 목숨을 내던지는 이들의 속사정과 그 경위를 조금이라도 일찍 파악할 수 있다면 세상은 훨씬 더 나은 곳이 되지 않을까. 백남기나 이한빛과 같은 이들의 희생은 좀 더 줄 것이고, 희생이 빛을 보게 되는 시간은 조금 더 빨라질 것이다.
계란의 희생이 좀 더 빨리 보상받는 세상, 그것 역시나 인간이 이뤄내야 할 또 다른 숙제다. 그래서 종국엔, 살아서도 모순을 고발할 수 있는 세상, 계란으로 바위를 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길 꿈꾼다.
남상욱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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