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퀴한 냄새와 푹 꺼진 소파, 지하의 음습한 기운, 손때 묻은 만화책들… 그때 그 시절 ‘만화방’의 이미지다. 그곳은 수업 시간에 땡땡이를 친 10대 청소년들의 아지트였고, 마땅한 취미거리가 없던 30~40대 아저씨들의 안식처였으며, 무릎 나온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동네 마실 나온 청년들의 사랑방이었다.
그러나 요즘 만화방은 다르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새롭게 단장하고 ‘카페’로 탈바꿈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늑하고 쾌적한 공간이 손님을 맞이한다. 만화책을 쌓아 놓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도 좋고, 푹신한 매트가 깔린 바닥에 누워 뒹굴뒹굴 휴식을 취해도 좋다. 커플에겐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다. 커피와 주스 같은 카페 메뉴부터 라면과 과자 등 각종 간식거리도 갖춰놔 입이 심심할 틈이 없다. 1만원짜리 종일권을 끊어 놓으면 이곳이 내 집 안방인 듯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동대문엔 쇼핑족 쉴 토굴 공간 인기
영등포 극장 옆엔 영화 원작 만화 가득
‘심야식당’ 음식 팔며 소문난 가게도
불과 3년 전만 해도 용어조차 낯설었던 만화카페는 이제 영화관처럼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서울 홍익대 인근에만 30곳에 가깝고, 대학로엔 10여곳, 신림동엔 20여곳에 이른다. 신촌의 한 만화카페는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국회의원 시절 업무카드가 사용됐던 곳으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개성만점 만화카페, 덕후들의 천국
서울 서교동의 만화카페 ‘즐거운 작당’은 그 일대 만화카페들의 원조쯤 된다. 만화 마니아인 김민정 대표가 2014년 문을 열었다. 주말엔 개점 시간에 맞춰 가지 않으면 자리잡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다. 소장 만화책만 3만8,000여권. 만화책이 천장에 닿을 높이까지 가득 들어차 있고, 계단 틈새와 기둥까지 책장으로 활용했다. 원래는 토굴 모양 좌식 공간으로 유명했는데, 1년여 전 그 공간을 책장으로 리모델링했다. 장정진 매니저는 “최근 만화카페 붐이 일면서 주변에 만화카페가 많이 생겼다”며 “그래서 책 보유량을 늘리는 데 집중하게 됐다”고 말했다. 주 이용객은 20~30대 만화팬들이지만, 도서관처럼 조용한 분위기를 찾아 개인 작업이나 공부를 하러 오는 이들도 많다.
망원동에 위치한 ‘망원만방’은 만화팬들에게 성지 같은 곳이다. 만화방은 쇠락하고 만화카페는 생소하던 2013년 상수동에 문을 연 ‘상수동 만화방’이 시초다. 한 달에 만화책 구입 비용만 20만원씩 썼다는 전직 플로리스트 임은정 대표의 꿈이 오롯이 담긴 공간이다. 2015년 망원동으로 옮겨 지금의 간판으로 고쳐 달았다. 상수동 만화방 시절부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단골들도 여럿이다. 인디밴드 눈뜨고 코베인의 보컬 깜악귀(본명 김남훈)도 그 중 한 명이다. 깜악귀는 동업자로 참여해 지난해 12월 이태원 해방촌에 오픈한 분점 ‘신흥만방’을 지키고 있다. 그는 “신흥만방은 도서 종수보다 큐레이션에 중점을 두고 독자들이 많이 찾는 작품 위주로 서가를 꾸몄다”며 “오직 만화만을 위한 공간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책들은 수집가들을 수소문해 직접 구했다. 신흥만방이 소장한 순정만화 중 3분의 2가 수집가 한 사람의 소장 도서였다고 한다.
장지동에 위치한 ‘장만동’은 특이하게 음식으로 뜨고 있는 만화카페다. 만화에 등장하는 요리를 판다. 만화도 보고 만화 속 음식도 먹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심야식당’에 나온 오코노미야키와, ‘요리왕 비룡’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비룡떡볶이가 인기 메뉴다. 전체 매출의 60%가 음식 판매에서 나온다. 오기욱 대표는 “적은 돈으로 창업한 탓에 초창기엔 만화책을 많이 갖추지 못해 그 대신 요리 연구를 하게 됐다”며 “비룡떡볶이로 번 돈으로 만화책을 샀다”고 말했다.
최근의 만화카페들은 지역 특색에 맞게 무한변신하고 있다. 서울 동대문 쇼핑타운에 자리잡은 만화카페 ‘코믹베드’는 인근 직장인들과 쇼핑족을 위한 휴식 공간이다. 찜질방처럼 누울 수 있는 토굴 공간을 2층짜리로 20여개 갖췄고 샤워 시설까지 구비했다. 영등포CGV에 문을 연 만화카페 ‘롤롤’은 영화 관람 전후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꾸몄다. 마블과 DC의 그래픽노블, 웹툰 등 영화 원작 만화들이 다수 비치됐고, 영화 관람객에겐 이용료도 할인해 준다.
대학생 김강인씨는 “만화방이 사라지고 웹툰이 대세가 된 이후 책장을 넘기는 아날로그 느낌이 그리웠는데 요즘 만화카페가 많이 생겨서 즐겨 찾고 있다”고 말했다.
만화 산업과의 상생도 고민해야
만화카페는 창업 아이템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놀숲, 카툰공감, 콩툰, 벌툰, 애니팝 등 만화카페 프랜차이즈만 10개가 넘는다. 놀숲은 2015년 1호점 오픈 이후 현재 전국 각지에 153개 매장을 열었다. 놀숲 관계자는 “창업 문의가 하루 평균 20건 가량 접수되고 있다”며 “올해 말까지 전국 매장 200개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콘텐츠산업통계조사에서도 만화카페 임대 사업체는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에는 2.4%, 2015년에는 3.3% 증가했고, 2016년에도 3.8%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홍대 인근 30여곳, 신림동 20여곳
놀숲, 콩툰 등 프랜차이즈만 10개 넘어
웹툰 대중화도 만화 독자층 확대 일조
만화카페 열풍에 대해 전문가들은 문화공간으로서의 의미에 주목한다. 망원만방과 신흥만방에 소장도서를 기증하기도 했던 김봉석 문화평론가는 “만화카페는 단지 만화만 보는 곳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립적 공간을 가지려는 수요가 결합돼 공간 자체를 향유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분석했다. 깜악귀는 “음원 스트리밍이 보편화되자 오히려 LP붐이 일었듯, 웹툰으로 인해 만화책을 보는 행위가 희소해지면서 만화카페가 일종의 문화체험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웹툰의 대중화로 만화 독자층이 넓어진 것도 만화카페 열풍의 한 가지 이유로 거론된다. 만화평론가인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웹툰의 등장으로 출판만화가 몰락할 거라 예상됐지만 누구나 일상적으로 웹툰을 접하게 되면서 오히려 만화 시장은 사상 유례 없을 만큼 확대됐다”며 “웹툰을 통해 만화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출판만화를 구매하거나 만화카페를 찾는 등의 적극적 독서행위를 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만화카페가 난립하는 현 상황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김봉석 평론가는 “이미 시장이 포화상태라 조만간 거품이 꺼질 것으로 본다”며 “한정된 공간에 어떤 책을 채워 넣어 개성을 드러낼 것인가 하는 ‘큐레이션’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인하 교수도 “만화카페들이 작가와 출판사의 저작권을 일정 부분 지불하는 시스템을 마련해 작가들에게 창작의 동기를 부여하고 전체 만화 산업에 기여하는 상생의 방안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김도엽(경희대 정치외교학3)ㆍ이진우(서울대 경제학3)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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