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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정체불명의 사람1

입력
2017.05.2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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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시의 중심가에는 관광객들이 넘쳐흐른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산 정상에 성이 있고, 주위에 강이 굽이쳐 흐르며,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강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나는 봐도 잘 모르지만 올드시티에는 로마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고 관광 안내 책자에 쓰여 있다. 흰색 파라솔 아래 커피와 음식들이 차려진 탁자들 사이를 지나노라면 어릴 때 본 주말의 명화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다. 물론 평일 낮에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관광객일 것이다. 대부분 서양 사람들이지만 나와 비슷한 외모를 지닌 동양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거리에서 나는 관광객13쯤 되는 사람이 되어 돌아다닌다. 그 정체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편리하다. 아니, 편리하다기 보다는 정체성이 있다는 면에서 마음이 편하다.

두어 달 머무를 숙소가 있는 동네는 중심가에서 버스를 타고 15분쯤 이동해야 한다. 그곳에서 나는 정체불명의 사람1이 된다. 일시적 삶이 아니라 지속적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나는 왜 이 곳에 있는지 알 도리가 없는, 허락도 없이 그들 속으로 스며들어온, 남다른 외모를 지니고 있는 사람1이 된다. 어떤 이들은 주목하고 어떤 이들은 무시한다. 버스에서 앉을 좌석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순간이나 동네 슈퍼의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쌀 한 봉지를 집어 드는 순간, 뭔가 어긋나 있는 불편함을 떨쳐내려 나는 잠시 비틀거린다.

나의 숙소는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있다. 오며 가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건물 주민들과 마주치는 일이 잦다. 엘리베이터는 그 옛날의 공중전화 박스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직접 손으로 문을 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서너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차는 협소함까지. 마주치는 사람들은 조용히 인사를 나눈다. 미소를 짓는 이도 있지만 습관처럼 짧게 인사말을 중얼거리는 이도 있다. 처음에는 어색한 미소만 짓던 내가 어느덧 이 나라 말을 배워, 불쑥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그러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갑자기 긴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한다. 나는 다만 짧은 인사말 정도만 알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다. 어쩔 줄 모르며 미안하다는 말을 되뇔 뿐이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가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우연히 다음날 그 할아버지와 다시 마주쳤는데, 나에게 “또 보자”라는 인사말을 가르쳐 주었다. 말이 안 통해도 말을 가르쳐 줄 수 있다니! 할아버지와 아파트 현관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나중에 내 나라로 돌아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어떤 말로든 어색한 인사를 건네 보자고 마음먹었다.

관광객 13의 정체성으로 강변의 카페에 앉아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펼쳐 든다. 몇 장 넘기기도 전에 이런 구절이 눈에 쏙 들어온다. ‘그 누구의 동정과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 이것 또한 가혹한 시련이다. 그녀는 장애인이지만 그것이 겉으로는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시각 장애인도 아니고 신체가 마비되지도 않았다. 겉으로 나타나는 장애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종종 거짓말쟁이나 얼간이로 취급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은 감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같은 취급을 받는다’(조석현 옮김, 알마). 살아오면서 숨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괴로움에 대해 한 번도 헤아려 본 적 없다. 말과 글이 통하지 않고, 나 자신을 설명할 방법이 별로 없는 것 또한 일종의 장애일 수 있다. 머나먼 나라로 날아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니. 이 겁 많고 협소한 자아로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일인가.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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