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시작한 것만 같은 책방이 어느덧 1년 하고도 반이 지났다. 서너 달에 걸쳐 집안 살림을 모조리 정리하고 시골집 좁은 마루에 책장을 짜서 들여 놓았다. 책을 채워야 하는데 암담했다. 어디서 책을 사야 하는지, 어느 곳이 더 싸게 주는지, 작은 책방과 거래를 틀 서적 도매상이 있는지 등등. 게다가 돈도 없었다. 그런데 이곳 저곳에서 불쑥불쑥 책을 보내왔고, 책장에 책이 채워지자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갈 때는 절대 빈손으로 가는 법 없이 책을 사서 들고 갔다.
사람들이 찾아온다고는 하지만 꼬불꼬불 구석진 시골 마을에 근사한 간판 하나도 없는 한적한 시골 책방. 이웃에 사는 시인이 책방 이름을 지어주었고, 어떤 손님은 하얀 벽에 붓글씨로 책방 이름을 써주었다. 그러니까 책방 이름도 짓기 전에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고, 그들은 작고 보잘것없는 ‘국자와 주걱’을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책을 만나는 것, 사방 벽이 책으로 둘러쳐진 공간에 있다는 것은 분명 설렘이었다. 온종일 넋을 놓고 앉아 있기도 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날그날 책과 함께 있다는 아련한 설렘으로 하루를 흘려 보내기도 했다. 주인장이 있거나 없거나 24시간 대문을 열어놓고 언제든 누구든 아늑한 잠자리에서 쉬어갈 수 있는 시골 책방. 짧은 기간이었지만 단골손님들이 직접 추천하는 책 이야기로 국자와 주걱의 소회를 대신하려고 한다.
“생명의 역사상 인류만큼 지구를 놀라게 하고 스스로도 놀라게 한 생명체가 있었을까?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굶주림에 헤매고 포식자들에 쫓기던 호미니드는 깜짝 놀랄 만큼 짧은 시간에 지구상 뭇 생명들에게 엄청난 위해를 끼치며 스스로의 삶의 재생산 기반까지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금세기 들어 급격한 수명의 연장은 장수의 축복이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죽지 못하는 저주로 생각되기까지 불과 몇십년이 걸리지 않았다. 영생을 찾아 헤매던 길가메시나 불사의 영약을 얻기 위해 전세계로 사신을 보냈다는 진시황의 꿈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다지만 생명의 필멸성을 뼈저리게 더 알게 된 것이 오히려 장수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ㆍ김구종 옮김
청목 발행ㆍ270쪽ㆍ5,500원
듣도 보도 못한 정치
이진순 등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240쪽ㆍ1만4,500원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
조너선 실버타운 지음ㆍ노승영 옮김
서해문집 발행ㆍ256쪽ㆍ1만3,500원
먼저 매달 백북스 모임의 소모임으로 과학책 읽기 모임을 국자와 주걱에서 함께 꾸려나가는 책방 단골 임성식씨가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이라는 책을 추천해 주었다. 생물학자인 저자가 수명과 노화, 죽음에 대해 위트와 유머를 양념 삼아 늙고 죽는다는 무거운 주제를 여유로운 자세로 요리하는 책. 25편의 시를 맨 앞에 구성해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그 내용은 상당한 학술적 깊이와 삶의 통찰을 담아내고 있다는 극찬과 함께.
두 번째 책은 책방 단골 권유미씨가 고른 ‘듣도 보도 못한 정치’라는 책이다.
“책은 민주주의와 정치 그리고 참여에 대한 이야기다. 발전된 IT기술을 통해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방법의 정치참여 운동이 생겨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참여방식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다. 이른바 ‘디지털 민주주의’다. 예를 들어, 앱을 통해 자신의 동네에 어떤 시설이 들어오는 것에 관해서 찬반의견을 낼 수 있고 토론이 가능하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인 또는 행정가들은 시민들이 원하는 일들을 기존보다 효율적 방식으로 해내갈 수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그는 ‘정치’라는 단어에 불쾌함, 혐오감이 아니라 시민들의 적극 참여와 투명한 정치활동을 통해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민주주의로 발전하기를 희망하는 염원을 함께 적어 보냈다.
마지막으로 우리 책방의 단골손님 함민복 시인이 추천하는 ‘명상록’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가 ‘국자와 주걱’ 이름을 지어주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개인을 위한 것이지만 국자와 주걱은 서로 나눔을 전제로 한, 공동체를 위한 도구라는 점에 착안했다 한다. 서점이 바로 공동체를 위한 도구 아니던가.
“너는 시신을 짊어지고 다니는 작은 혼일 뿐이다”라는 에픽테토스의 말을 인용해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는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이며, 인간 중심으로 사상을 전개한 스토아학파 철학자이다. “너와 함께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벌써 세상을 떠났는가.” 저자는 짧은 인생에서 유일한 가치는 자연과 일치된 삶을 사는 것과, 공동체적 삶을 사는 것밖에 없다고 한다. “벌떼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한 마리 벌에게도 유익하지 못하다.”
이 책의 문장은 시적이고 아름답다. 매 쪽마다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이 책을 읽으려면 연필 들고 밑줄 칠 준비를 먼저 해야 한다. 내 삶에 밑줄을 그으며 다가 온 ‘국자와 주걱’에서 만난 이 책의 소개를, 밑줄 그었던 몇 구절로 대신한다. “복수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네 적처럼 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는 그 생각 때문이지 죽음 자체는 아니다.” “너는 스스로 똑바로 서야지, 똑바로 세워져서는 안 된다.” “공동체에 유익한 것들만이 나에게는 선이다.”
강화도 국자와 주걱 김현숙. 북스테이네트워크(bookstay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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