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물책임법 개정 필요”
AI 발전이 가져온 법의 허점
홍모(36)씨가 탑승한 자율주행차가 싱크홀을 피하다 옆 차선에서 달리던 박모씨의 승용차와 충돌했다. 홍씨는 핸들과 브레이크 없이 인공지능이 운행하는 자율주행차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사고 책임이 없다고 항변했다. 차량파손 피해를 입은 박씨는 자율주행차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자동차 제조사는 “자율주행차가 ‘로봇 면허’를 소지하고 있어 면책된다”며 배상을 미루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지 모르는 가상 사례다. 이중기 홍익대 로봇윤리와법제센터장은 24일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과 사법의 과제’ 심포지엄에서 이처럼 자율주행 자동차의 발달에 따라 달라지는 민사상 책임법제를 소개했다.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원장 호문혁)과 서울대 공익산업법센터(센터장 이원우)가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 필요한 법률이 무엇인지 대비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이 센터장은 “자율주행 자동차 기술이 상용화되기 앞서 자율주행차의 제조물 책임을 인정하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공지능의 자율적 판단으로 자동차 사고가 난 경우 현행 법으로는 피해자가 배상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은 운전자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돼 있다.
그러나 자율주행과 함께 사람이 운전에 개입할 수 있는 중간단계의 자율주행, 나아가 완전 자율주행차가 등장할 경우 제조회사 책임이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센터장은 “운전대 없이 자율차가 스스로 운행하는 최종단계 자율차의 경우에는 사람이 ‘탑승자’ 지위로 밀려나 사고발생 시 책임도 제조자가 모두 져야 한다”며 “이로 보면 자율주행기능을 담당하는 인공지능 결함에 대해 제조업자 책임을 인정하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법 개정이 없으면 자율차에 탑승한 사람과 자율차 제조자 모두 책임을 지지 않아 피해보상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사람의 개입 없이 차량을 운행하는 인공지능에게 부여하는 ‘로봇 면허’는 더 엄격한 운전자 주의 의무를 줘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자율차 센서는 인간 운전자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 운전자는 싱크홀을 파악했을 때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는 행동을 할 수 있어 ‘긴급피난’이라 정당화할 수 있으나, 인공지능은 센서를 통해 싱크홀을 미리 알아야 하고 위험을 피하지 못한 경우 운전능력 부족으로 봐야 한다는 게 이 센터장의 설명이다.
자율주행차에 대비해 마련한 현행 법률에도 개선이 필요하다. 현행 자동차관리법 제2조1의 3호는 자율주행 자동차에 대해 ‘운전자 또는 승객의 조작 없이 자동차 스스로 운행이 가능한 자동차’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과 인공지능이 함께 차량을 운행하는 중간단계 자율주행차를 포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우민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행정 규제나 민사책임과 관련한 법률은 물론 (자율차)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제조자에 관한 제조물 책임 등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면서 “자율차가 운수업 종사자들에게 미칠 영향 등 사회구조적 변화를 고려해 순차적으로 입법 로드맵을 구성해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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