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오랫동안 입는다는 건 예전에는 단지 절약의 차원이었다. 긴 전쟁과 복구의 시대를 거치며 아껴서 살림을 유지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고 유행은 빠르게 변화하고 옷의 수명은 유례 없을 만큼 짧아졌다. 이런 풍조에 대한 반발로 패션에 관심을 유지하되 옷을 오랫동안 입어보려는 문화가 등장했다.
우선 빈티지 캐주얼이 있다. 몇 년 전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덕지덕지 수선 흔적이 가득한 오래된 바버의 자켓을 입고 있는 모습이 영국 방송에 찍힌 적이 있다. 그는 기우고 수선한 자국이 보이는 더블 브레스트(겹 여밈) 정장 수트를 입고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흔히 볼 수 있는 패션은 아니다. 하지만 왁스트 코튼 자켓(왁스로 코팅한 면 자켓)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입는 옷이다.
필슨이나 바버, 벨스타프 같은 오랜 역사의 브랜드들이 20세기 초반 내놓은 제품들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엔 방수가 제대로 되는 섬유가 없었기 때문에 면 위에 왁스를 발랐다. 이런 옷은 정기적으로 왁스를 다시 발라 줘야 하는데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대신 수선이 쉽고 오래 입으면서 특이한 흔적이 생겨 세월이 흐르면 독특한 스타일이 완성된다.
파타고니아 같은 브랜드가 펼치는 ‘원 웨어(Worn Wear) 캠페인’도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옷을 오래 입자는 이야기다. 이런 캠페인은 새 옷을 팔아야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모순적이다. 하지만 그 만큼 판매하는 옷의 가치를 높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캠페인은 최근 많은 브랜드들이 주목하는 ‘환경에 도움 되는 지속 가능한 패션’의 일환이다. 물을 절약하거나 이산화탄소를 덜 발생시키는 공정을 도입하고 별도의 컬렉션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물론 환경에 도움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지고 있는 옷을 오래도록 입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건 낡은 옷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다. 낡은 옷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멋을 표현한 화보를 계속 내놓는 건 그런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레플리카(Replicaㆍ복제품) 청바지 문화가 있다. 1970년대 펑크와 하드록, 헤비메탈 문화를 거치며 찢어지고 낡은 청바지는 패션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찢어진 청바지에 반감을 느낀 이들 사이에선 투박한 본래의 매력을 다시 들춰내는 문화가 등장했다. 더 나아가 옛 시대의 기계와 제조법으로 과거의 청바지를 복각해 내는 문화로 발전했다. 이렇게 만든 청바지는 새파란 무가공의 옷이다. 청바지 천은 자주 움직이는 부분이 쉽게 닳고 물이 빠지는 특성이 있다. 옷을 입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생활을 하는지에 따라 고유의 무늬가 옷에 새겨지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옷 위의 흔적은 제조사에서 만든 인공적 ‘페이드(Fadeㆍ색이 바래다) 진’과 다르다. 자신의 삶이 반영된 단 하나의 옷이 되는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만의 페이드 진을 만들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전시하며 서로 평가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말한 옷을 오래 입는 방식은 옷 자체의 특성을 이용해 변화시키며 자기만의 흔적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적극적인 자기만의 스타일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옷을 오래도록 입으며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일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옷을 잘 관리해 가며 함께 5년, 10년을 지내려 해도 그 사이에 체형이 변하면 소용 없는 일이다.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갖고 적어도 현재 상태를 건강하게 관리해 나가는 노력이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 체형 자체가 유행과 패션의 대상이 되어 가는 세상에서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패션 칼럼니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