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론대회 1등 상금 200만원 전액
시각장애 학우에 고속스캐너 선물
“학기 초만 되면 혼자 끙끙대면서 교재 준비한다고 힘들어 하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이 변론대회에서 수상한 상금 전액을 시각장애를 가진 학우를 위해 내놓았다. 지난 1월 법원행정처가 주최한 제8회 가인 법정변론 경연대회(전국 로스쿨 모의법정변론대회)에서 단체 성적 1위에 해당하는 ‘자유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은 200만원. 수상을 한 2, 3학년 24명이 공히 “학교에서 쌓은 지식을 발휘하러 나간 대회니까 좋은 일에 쓰자”면서 뜻을 모아 내린 결정이었다. 이 돈은 평소 시각장애로 교재 준비에 어려움을 겪던 3학년 최민석(35)씨를 위해 지난달 12일 고속 스캐너를 구입하는데 쓰였다.
23일 서울대 법학관에서 만난 2학년 문준영(25)씨는 “애초 상금을 받으려고 나간 대회도 아니었다”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밤 11시까지 매달려도 시간이 모자라는 게 법 공부”라는 3학년 이금선(25)씨는 “항상 남들보다 한두 시간 일찍 열람실에 나와 공부하던 동기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이계정 대회 지도교수는 “직접 가르친 학생들이 자신이 아닌 동료를 위해 상금을 내놓은 것이 기특하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최씨는 서울대 로스쿨 2호 시각장애인. 다섯 살 때 녹내장이 발병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던 수재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법학수업은 다른 학우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만 따라가는 게 가능했다. 최씨는 “시각장애인 전용 교재가 턱없이 부족해서”라고 했다. 교재를 낱장으로 자른 후 하나씩 스캐너에 집어 넣은 후, 스캔이 된 이미지를 OCR광학판독프로그램을 이용해 텍스트문서로 변환, 다시 음성화 프로그램을 통해 귀로 듣고 이해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겪어 왔다는 게 그의 얘기다. 보통 법학 수업의 경우 교재는 권당 수백 페이지, 더러는 1,000페이지가 넘는 것도 있다.
그는 그마저도 한글 인식이 잘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한자는 아예 판독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시험문제에 나온 ‘甲乙丙丁(갑을병정)‘조차 인식이 안 돼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 때도 있었다”고 했다. 최씨는 “후배들이 기증한 ‘자동급지 고속 스캐너’로 교재 준비시간이 확 줄었다”며 고마워했다. 이제 교재 수백 장을 쌓아두면 자동으로 ‘주르륵’ 스캔을 할 수 있게 됐다.
최씨는 학우들의 응원에 힘입어 “장차 장애인 인권 문제 등의 공익활동으로 보답하고 싶다”고 밝혔다. 최씨는 이미 2007년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시험을 지원해달라”고 법무부에 요청해 각종 국가고시 제도 자체를 바꾼 경험도 있다. “시각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로 사회를 바꾸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는 최씨의 도전에 동기, 후배들의 지지와 격려가 담긴 선물 하나가 큰 힘이 됐다.
글ㆍ사진=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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