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등 대기업에서 총 592억원의 뇌물을 받거나 요구한 혐의로 구속기소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정식재판이 23일 오전 10시 서울법원종합청사 417호 대법정에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 심리로 열렸다. 호송차를 타고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한 박 전 대통령은 사복을 입고 수갑을 찬 채 다소 수척한 모습이었다. 표정변화 없이 재판정에 들어선 박 전 대통령은 뒤늦게 입장한 ‘비선실세’ 최순실씨와 같은 자리에 앉았으나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선 것은 과거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헌정 사상 세 번째다. 전∙노 두 전직 대통령 재판은 노 전 대통령이 기업총수들로부터 수천억원대 정치자금을 받아 시작됐다. 그러나 검찰은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항쟁 당시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에 대해서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자 형법상 내란죄까지 수사를 확대했다.
결국 검찰은 1996년 1월 전 전 대통령을 반란·내란수괴·내란목적살인·상관살해미수죄·뇌물죄, 노 전 대통령을 반란·내란 중요임무종사·상관 살해미수죄·뇌물죄를 각각 적용해 기소했다.
첫 재판은 1996년 2월 26일 열렸다. 재판 장소는 박 전 대통령 재판 장소와 같은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이다. 150석 규모의 417호 법정은 서울중앙지법 내에서 가장 크다. 국민들의 관심이 워낙 커서 방청권 배부도 미리 추첨을 거쳤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이날 전씨의 첫 공판 방청권은 암거래를 통해 장당 50만원까지 치솟았다.
수갑 없이 당당한 전두환… 취재진 건강 질문에 “좋아요” 대답도
1996년 2월 26일 오전 9시 18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서울지법 청사 지하 구치감의 호송통로에 도착했다. 왼쪽 가슴에 ‘3124’라는 미결수 번호를 단 하늘색 수의를 입은 전씨는 수갑이나 포승줄을 하지 않은 상태로 호송차에서 내렸다.
당시 전씨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67일간 서울 송파구 경찰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재판에 참석했으나 건강하고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수갑을 찬 채 부축을 받으며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장한 박 전 대통령과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전씨는 사진기자들을 향해 인사하듯 왼손을 올리는 등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고 건강을 묻는 취재진 물음에 “좋다”고 대답했다.
全 “여러 사람이 정치자금 받아 부패 심해져… 나 혼자 정치자금 관리” 궤변도 불사
전씨는 재판정에서도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5공화국에서 조성한 비자금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고 “청탁이나 이권보다 정치 안정을 바라는 우국충정에서 냈을 것”이라거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가 있는 곳에 정치자금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둥 궤변을 늘어 놓으며 정당성을 주장했다. 전씨는 또 “본인(전씨)이 돈을 받지 않으니까 기업들이 불안해 잠을 자지 못하고 심지어 외국 망명까지 생각하며 투자를 하지 않았다”며 “이전 정권에서 여러 사람이 정치자금을 관리해 정치 부패가 심했는데 이를 막으려고 혼자 정치 자금을 조성해 관리했다”고 주장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비자금에 대해 “관행에 따라 으레 그런 것인 줄 알고 받았다”며 상식 밖의 대답을 했다.
전씨는 재판에서 적극적으로 답변했을 뿐만 아니라 오전 공판 후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안현태 전 경호실장, 정호용 전 국방장관 등과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심지어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김성호 검사하고도 거리낌없이 악수를 했다. 이를 지켜본 방청객들은 “의연한 것인 지 뻔뻔한 것인 지 모르겠다”며 어이없어 했다. 이 같은 국민 감정은 2월 27일자 한국일보의 ‘고개쳐든 「피고인 全斗煥(전두환)」’ 이라는 제목에 그대로 드러났다.
전재용, 故 박종철 아버지가 던진 계란 맞아
故 강경대 아버지는 전씨 호송차에 계란 던져
전씨가 여유를 부린 법정 안과 달리 밖에서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날 오전 9시 15분쯤 재판 방청을 위해 형제들과 함께 법원에 들어선 전씨의 둘째 아들 재용씨는 날아온 계란에 머리를 맞았다. 계란을 던진 사람은 1987년 공안당국의 고문으로 사망한 고 박종철씨의 아버지 박정기씨였다. 박씨는 “너희 아버지한테 잘못을 인정하고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으라 하라”고 외치며 전씨 가족의 수행원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1991년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를 벌이다가 진압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고 강경대씨의 아버지 강민조씨도 전씨의 호송버스 앞 차창에 계란을 던졌다. 또 법원 앞에 모인 한총련, 민가협, 유가협 회원 50여명도 “학살자를 처벌하라” 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두 사람의 재판은 1996년 8월 1일까지 총 33회 열렸다. 1심 재판부는 그 해 8월 26일 전씨에게 사형과 추징금 2,259억5,000만원, 노씨에게 징역 22년6월과 추징금 2,838억9,600만원을 선고했고 이듬해 4월 대법원에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2년을 확정 판결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12월 이들을 모두 특별 사면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자료조사 박서영 solu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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