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기념식은 문자 그대로 명실상부하게 치러졌습니다. 문 대통령이 팔을 힘차게 흔들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고 눈물을 흘리며 유가족의 슬픔을 보듬어 안았습니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객관성과 보편성을 인정받은 5∙18민주화운동은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야 비로소 온전한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되돌아온 건 또 있습니다. 바로 보훈단체들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과 관련해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대한민국상이군경회, 대한민국재향군인회, 광복회 등 13개 보훈단체는 2016년 2월 중앙보훈단체안보협의회라는 단체를 결성한 바 있습니다. 이 단체는 지난해 제36주년 5∙18기념식을 이틀 앞둔 16일 단체행동에 나섰는데,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보훈단체 맏형으로서 독립운동가 후손과 유족으로 구성된 광복회도 함께였습니다.
보훈단체를 지원하는 상위 기관인 국가보훈처는 한술 더 떴습니다. 2015년과 2016년 5∙18기념식 직전에 보도자료까지 배포해가며 제창 불허 이유를 공개했습니다. 요약하면, “북한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됐고, 노래 제목과 가사 내용에 나오는 ‘임’과 ‘새날’의 의미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훈처의 이 같은 주장은 이미 작곡가 김종률씨와 공동작사가 황석영씨에 의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사실이 아닌데도 ‘국론분열’이라는 용어를 들먹이며 보훈처와 보훈단체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에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막상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 2017년 제37주년 5∙18기념식에서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노래 제창 논란을 점화하지 않았던 1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노래는 단 한 글자도 안 바뀌고 제창됐는데 왜 그들은 보도자료를 뿌리지도 단체 행동을 하지도 않았는지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박승춘 전 보훈처장이 사라진 것입니다.
“박승춘 전 보훈처장이 참 나쁜 짓 많이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보훈단체 수장이니까 그걸 이용해서 우리가 본의 아니게 끌려 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18일 광복회 관계자의 말입니다. 이 관계자는 “우리는 수익사업을 할 수 없어서 보훈처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운영된다”며 “그쪽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드러내놓고 반발할 수 없는 구조다”고 당시 단체행동을 벌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렇게라도 뒤늦게 반성을 하는 단체는 그나마 낫습니다. 아예 발뺌하는 단체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 관계자는 “그동안 제창 찬성 반대 관련해서 의견을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박승춘 전 처장이 물러난 자리에 피우진 신임 처장이 들어서자 급속한 태세전환에 나선 보훈단체들을 국민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물론 그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박 전 처장의 전횡이 도가 지나치기도 했고 보훈처가 100억원이 넘는 지원비 예산을 쥐고 있는 이상 구조적으로 상위 기관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이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박 전 처장에 굴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유공자로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알아서 기는 추종자의 권리는 액세서리에 불과합니다.
새로 임명된 피 처장은 인권과 성평등 문제와 싸워 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박 전 처장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피 처장 임기 동안에 보훈처 산하 보훈단체들도 부디 자신들의 권리를 잊지 말고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않을 자존심을 키워주기를 국민들은 바랄 것입니다.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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