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의 체스
파올로 마우렌시그 지음·이승수 옮김
민음사 발행 252쪽. 1만3,500원
성공한 독일 사업가인 프리슈가 어느 날 오스트리아 빈의 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총알이 입천장을 관통해 머리를 뚫고 나온 모습으로. 그의 곁에는 권총 한 자루가, 서재 책상 위에는 게임이 한창 복잡하게 진행된 듯한 체스보드가 놓여 있다.
전형적 추리소설 형식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화자를 그때그때 바꾸며 비극의 단초를 추적할 단서를 제공한다. 첫째 체스잡지 ‘데어 투름’를 발행할 정도로 체스를 좋아하는 프리슈는 원리원칙에 입각해 이성에 따라 게임하는 ‘아리안 체스’의 신봉자라는 사실, 그렇기에 예상치 못한 도발을 감행하는 ‘유대인 체스’를 경멸한다는 사실. 둘째 매주 주말 빈으로 떠나는 열차에서 친구와 체스 게임을 즐긴다는 사실. 셋째, 그에게는 2차 세계대전 때 강제수용소 소장으로 일한 전력이 있다는 사실.
숨지기 며칠 전, 기차에서 체스를 하던 프리슈에게 유대인 청년 마이어가 훈수를 두며 접근한다. 마이어는 선수가 잘못된 수를 놓으면 말을 거쳐 몸 전체에 전기가 흘러 쇼크를 일으키게 된다는 ‘죽음의 체스보드’ 이야기를 꺼내고, 프리슈는 죽음의 체스보드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고 말한다. 프리슈는 마이어에게서 체스보드 주인인 스승 타보리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아는 인물임을 직감한다.
부유한 유대인 미술상 아들로 태어난 타보리는 강제수용소를 탈출하다 붙잡히고, 다른 동료들과 달리 총살을 면한다. ‘유대인 체스 선수’를 알아본 소장은 체스를 두기 위해 그를 살려뒀다. 수감자들의 목숨을 판돈으로 내건 체스 게임에서 타보리는 두 번 패해 24명의 수용자가 처형당했다. 수용소를 나온 후 죽은 이들이 살던 동네를 찾아 용서를 구한 타보리는 자신에게 죽음 이상의 자괴감을 안겼던 수용소 소장을 찾기 위해 마이어를 키워낸다.
체스에 사용된 말 중 하나인 폰(Pawn)은 장기의 졸에 해당한다. 가장 흔하고, 가장 약해서 양측은 각각 8개의 폰을 갖고 시작하는데 뒤나 옆이 아닌, 앞으로 한 칸씩만 전진할 수 있다. 이렇게 졸보다 못한 폰이 마지막 열에 도달하면 운명은 뒤바뀐다. 폰은 다른 기물로 ‘신분상승’하는데, 이때 퀸, 룩, 비숍, 나이트 등 킹을 제외한 어떤 기물로도 바뀔 수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타보리와와 그가 키워낸 마이어처럼.
히틀러 정부를 비난하며 부인과 자살한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죽기 1년 전에 쓴 대표작 ‘체스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쓴 ‘폰의 체스’는 츠바이크를 오마주하면서도 제목처럼,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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