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난을 딛고 천신만고 끝에 제왕의 자리에 올라 23년 간 문치의 기반을 다진 당(唐) 태종 이세민은 “배는 군주에 비유되고, 물은 백성에 비유된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말을 되새겨 백성을 존중하며 겸허히 처신해 소통 리더십의 대명사로 꼽힌다. ‘정관(貞觀)의 치세’를 이룬 태종의 명신으로는 전장을 누빈 창업공신 방현령(房玄齡), 제왕을 보필한 재목 두여회(杜如晦)에 이어 위징(魏徵)이 거론된다. 위징은 인물 분석가인 왕규(王珪), 북방의 맹장인 이정(李靖), 덕행과 충직의 우세남(虞世南), 순박한 전략가 이적(李勣), 식객 출신의 기만한 변론가 마주(馬周) 등 다른 명신과는 태생이 꽤 달랐다.
정적인 태자 건성(建成)을 죽인 태종은 건성의 최측근이던 위징을 불러 “그대가 우리 형제를 이간시킨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질책했다. 그러자 위징은 “황태자가 만일 제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오늘의 재앙은 없었을 것”이라고 기세 등등하게 되받아 쳤다. 그런데도 태종은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발탁했다.
정관 2년 태종이 위징에게 현명한 군주와 어리석은 군주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군주가 영명한 까닭은 널리 듣기 때문이고, 군주가 어리석은 까닭은 편협하게 어떤 한 부분만을 믿기 때문”(<정관정요貞觀政要> ’군도(君道)’편)이라며 진(秦) 2세 황제가 환관인 조고(趙高)의 말만 듣다가 돌아선 민심을 알아채지 못해 천하를 잃고, 양(梁) 무제(武帝)가 주이(朱异)의 말만 듣고 중용해 후경(侯景)의 반란군이 수도에 진입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 등을 들어 신하의 말을 경청하라고 주문했다.
정관 10년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선 때 태종이 창업과 수성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라고 물었을 때, 창업이 더 어렵다는 방현령과는 달리 변화하는 민심을 거론하며 수성의 어려움을 피력해 태종이 초심을 유지하도록 한 것도 위징이었다.
정관 6년, 누군가 상서우승(尙書右丞)이던 위징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고발했으나 무고로 밝혀졌다. 위징은 태종에게 양신(良臣)이 되길 원하지 충신(忠臣)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양신은 스스로 좋은 이름을 얻고 군왕께도 숭고한 칭호를 누릴 수 있게 해 자자손손 대대로 전해지기에 영화와 부귀가 끝이 없습니다. 충신은 스스로를 멸망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군왕도 아주 큰 악명에 빠지게 합니다. 집안과 나라 모두에 손실을 끼치고도 혼자서 충신의 이름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어진 신하와 충신은 서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납간(納諫)’편).
과연 위징이 말하는 양신은 무엇인가? ‘택관(擇官)’편에 인용된 이 얘기는 원래 유향(劉向)이 편찬한 <설원說苑>에서 성신(聖臣), 양신(良臣), 충신(忠臣), 지신(智臣), 정신(貞臣), 직신(直臣) 등 군주에게 도움이 되는 여섯 유형의 바른 신하, 즉 육정신(六正臣)의 두 번째와 세 번째 항목에 나온다. 양신은 “전심전력으로 국사를 처리하고 매일같이 군주에게 좋은 의견을 바치며, 예의로써 군주를 염려하고, 훌륭한 계책은 군주에게 아뢰고, 군주에게 좋은 생각이 있으면 따르고, 군주에게 허물이 있을 때는 바로잡는”(‘택관’편) 존재다. 충신은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현명하고 재능 있는 자를 추천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항상 고대 현인의 행실을 칭찬하며, 그것으로 군주의 의지를 격려한다”. 비슷해 보이지만, 고대가 기준이 되어 현재를 비판한다는 차이가 분명하다.
당 태종에게 무려 300회나 간언을 했던 위징도 성신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신은 바로 이런 유형이기 때문이다. “일의 맹아(萌芽)가 아직 움직이지 않고 형체가 드러나기 전에 독자적으로 나라의 존망과 득실의 요령을 미리 정확히 보고,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소멸시켜 군주로 하여금 영광된 지위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택관’편).
위징은 때로는 “이 늙은이를 치우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먼 훗날 태종은 “내가 오늘의 업적을 이룰 수 있게 하고 천하 사람들의 칭찬을 듣게 한 것은 오직 위징뿐, 신하 가운데 그 누구도 위징을 뛰어넘는 자는 없소”라고 극찬할 정도로 일등 공신으로 꼽았다.
위징이 병에 걸려 죽고 더 이상 자신에게 쓴 소리를 해 주는 신하들이 없게 되자 태종은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과거 위징만이 항상 나의 허물을 지적했소. 그가 죽은 이후로 나에게 잘못이 있어도 그것을 명확하게 지적하는 사람이 없소. 내가 어찌 과거에만 잘못을 저지르고, 오늘날에는 전부 옳은 행동만 하겠소? 그 원인은 많은 관원이 순종만 하고 감히 용의 비늘을 거스르기를 꺼리기 때문이오”(‘임현’편).
군주와 신하의 치열한 정치토론집인 <정관정요>는 그 어디를 펼쳐 보아도 중국의 가장 위대한 군주였던 당 태종의 소통의 리더십, 열린 리더십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일독할 만하다.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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