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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읽기]죽음으로 테베의 정의를 지킨 에테오클레스

입력
2017.05.1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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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반니 실바니의 1820년작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케스의 대결'.
지오반니 실바니의 1820년작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케스의 대결'.

인생은 일상의 반복(反復)같지만, 사실은 반전(反轉)을 기다리는 초초한 순간들의 연속이다. 예술이란 다가오는 지금 이 시간을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순간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과학자이자 의학의 창시자인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예술’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창작적인 활동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 예술은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을 만드는, 자신만의 고유한 최선이자 기술이다. 이 예술은 시간의 자연스런 흐름을 가로막아 단절시키고, 그 순간을 자신만의 미래를 위한 전초기지로 만드는 시도다.

예술의 순간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과거에 답습하던 길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길을 탐험한다. 그 길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시발점이나 종착점이고, 과정이자 결과다. 한 마디로 종말론적이다. 그가 현재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은 그가 먼 미래에도 열망하는 말과 행동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자신이 아직 디뎌보지 않은 길, 남들이 가본 적이 없어 발자국이 없는 길로 들어서는 사건을 ‘반전’이라 부른다.

반전과 대오가 있는, ‘복잡한’ 비극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에는 ‘단순한 이야기’와 ‘복잡한 이야기’가 있다고 소개한다. 단순한 이야기는 추측할만하여 한계가 보이고, 지속적이다. 또한 일관되기에 운명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복잡한 이야기에는 반전 혹은 대오(大悟)의 순간, 혹은 두 개 다의 순간이 존재한다. 반전과 대오는 이야기가 전재되는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반전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난 후, 주인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반전’을 그리스어로 ‘페리페테이아’(peripeteia)라고 명명하고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반전은 사건들이 일어난 과정에서 개연성과 필연성에 따라 발생하는 (급격한) 방향전환이다.”(‘시학’) 반전을 다시 설명하자면, 어떤 사건을 통해 자신이 습관적으로 가던 길에서부터 이탈하여 ‘주위의 다른 길로’ + ‘자신을 밀어 넣는 행위’(‘페리’ + ‘페테이아’)다. 여기서 어떤 사건이란 사람에 따라서는 반전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다. 반전은 비극을 보는 관객들을 공포와 연민의 감정에 휩싸이게 만들고 실제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반전은 관객의 관심과 재미를 자극하고 유지하게 만든다. 비극은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통해 공포와 연민을 자아내는 사건에 대한 재현이다. 반전의 순간은 주인공의 행운이 불행으로 전이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운명의 전환을 보는 관객들에게 한없는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훈련시킨다.

삶의 반전을 통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삶의 비밀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삶의 큰 깨달음을 한자로 대오(大悟)라 부른다. 대오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여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독수리의 눈으로 굽어보고 자신의 현재 위치를 확인하며 자신이 가야 할 유일한 길을 아는 마음가짐이다. ‘크게 깨달은 자’는 삼라만상의 음양오행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겨 마음속에 간직하고 언제든지 말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대오’를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라고 부르고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대오는 무지의 상태에서 지식의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대오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보는 신통한 능력이 아니라, 이전에 주인공 주위에 존재했지만 정신적이며 영적인 능력이 없어 볼 수 없고 알 수 없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은 반전을 통해 자신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된다.

‘대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를 글자 하나하나 풀어 번역하면 ‘우주의 질서와 자신의 임무를 ‘다시 한번’ + ‘깨달아서 아는 마음가짐’(‘아나’ + ‘그노리시스’)이다.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알고 자신의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을 ‘숭고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숭고’에 해당하는 ‘노블’(noble)이란 단어도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다.

라이오스가 자초한 저주

아이스킬로스의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수들’은 기원전 467년에 아테네 디오니소스 비극경연대회에서 무대에 올라간 트리올로지 중 세 번째 작품이다. 나머지 두 개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는 남아있지 않다. 라이오스는 피난처를 제공한 피사의 왕 펠롭스에게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아들 크리시포스를 강간함으로 스스로 삼대에 걸친 저주를 시작하였다. 도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관습은 주인과 손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환대와 감사라는 거룩한 약속이다. 라이오스는 이 거룩한 관습을 파기하는 터부를 범했기 때문에, 아폴로 신은 라이오스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경고한다. 만일 자식을 낳을 경우 저주가 그 집안에 영원히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라이오스는 아들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신하를 시켜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라이오스는 인간사회의 기본 틀인 아버지와 아들의 거룩한 끈을 끊으려 했다. 신하는 오이디푸스를 죽이지 않고 발을 묶어 산에 유기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근처 도시 코린토스 왕의 양자가 된다. 라이오스의 폭력은 오이디푸스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일 운명이라는 신탁을 듣고, 코린토스를 떠나 이웃도시 테베로 가던 중 길거리에서 이름 모를 왕을 만난다. 그 왕이 길을 비켜주지 않자 ‘분노’가 치밀어 ‘실수’로 그를 죽인다. 그가 아버지인 라이오스였다. 그리고 테베로 들어가 운명의 장난으로 왕비인 요카스타가 자신의 어머니인 줄 모르고 결혼한다. 뒤늦게 깨달은 요카스타는 자살한다. 오이디푸스도 핀으로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된다.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수들’에서 등장하는 에테오클레스, 폴리니케스, 이스메네, 그리고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요카스타 사이에 태어난 형제자매들이다. 이 비극작품은 에테오클레스라는 인물을 통해, 라이오스의 실수로 시작된 비극이 어떻게 종결되는지를, 그리고 테베라는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도시문명이 어떻게 보존되는지를 알려준다. 이제 막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도시 공동체’가 무엇이며, 그 공동체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지 묻는다.

죽음으로 테베 지킨 에테오클레스

이 비극에는 에테오클레스, 테베 여인들로 구성된 합창대,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그리고 전령이 등장한다. 에테오클레스와 싸우는 폴리니케스는 이름만 언급될 뿐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등장인물 이외에 신화적인 인물들과 철학적인 개념들이 의인화하여 등장한다. 전쟁의 신인 아레스, 분노, 저주, 정의, 그리고 아폴로신은 이 비극을 관람하는 아테네시민들에게 익숙하다. 아테네의 기본은 ‘정의’다. 비극 전체는 정의가 무너질 때, 전쟁, 분노 그리고 저주가 얼마나 인간사회를 파멸로 인도하는지 보여준다. 정의는 신과 인간, 주인과 손님,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사이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오이디푸스가 죽자, 그의 두 아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케스가 테베의 왕권을 두고 싸운다. 번갈아 가며 테베를 통치하자고 결의했으나 에테오클레스가 왕권을 내려놓지 않자, 폴리니케스는 아르고스의 왕 아드라스투스와 다른 6명의 왕과 함께 테베를 공격한다. 폴리니케스가 자신이 태어난 어머니와 같은 테베를 공격하는 행위는 근친상간적인 범죄이며 도시의 근간인 ‘정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폴리니케스와 6명의 왕은 테베의 일곱 성문에서 에테오클레스, 6명의 장수와 결투를 벌인다. 폴리니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일곱 번째 성문에서 대결한다. 에테오클레스는 피할 수 없는 저주에 근거한 운명적 ‘형제살해’ 결투를 결심한다. 그는 테베를 지켜야 하는 왕이자 용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한다. 자신의 형제인 폴리니케스를 살해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도시는 보호해야 한다.

이 두 형제간의 전투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결투장면을 본 전령(‘전’)이 합창대(‘합’)와 그 내용을 노래로 주고받는다. “(합)무슨 일이 일어났어? 우리 도시에 새로운 공포가 다시 찾아오는거야? (전)우리 도시는 안전하지.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합)그들이 어떻게 되었다고? 나는 혼돈스러워. 나는 무서워 들을 수가 없어. (전)자, 진정하고 들어봐.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합)오, 불행이여! 나는 최악을 추측하지 않을 수 없어. (전)그 둘, 둘 다, 완전히. (합)비극적 종말이야? 아, 슬프다. 말 좀 해줘. (전)둘 다 죽었어. 서로 죽였지.”(804~812행)

에테오클레스는 폴리니케스가 테베와 자신을 죽이러 오는 ‘반전’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는다. 처음에는 왕권을 독차지하려는 야심찬 권력자로 출발하여, 나중에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테베 도시의 안전과 명성을 지킨다. 그는 심지어 형제살해까지도 감행하고 스스로는 ‘순교’하여 테베의 정의를 수호한다. 아이스킬로스는 숨죽여 이 비극을 관람하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질문한다. “여러분들에게 아테네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아테네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습니까?”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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