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파키스탄은 종파 간 폭력의 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 같은 타 종교는 물론 시아파, 아흐마디 등 이슬람 내 소수 종파에 대한 주류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파키스탄 인구의 약 6%에 해당하는 시아파 내에서도 일부 수니파 공격을 감행하는 집단이 있으나 그외 대부분의 종파폭력은 수니파 극단주의 세력이 자행하고 있다.
올해 2월 남부 신드주에서는 이슬람 수피주의(신비주의) 신전이 공격받아 시민 90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3월 야외 공원에서 부활절을 축하하기 위해 운집한 기독교도 중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76명도 테러로 인해 숨졌다. 두 공격 모두 극단주의 무장조직 파키스탄 탈레반(TTP) 내 정파인 ‘자마툴 아흐라르’가 배후를 자처했다. TTP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별개의 조직으로, 와지리스탄 등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접경 지역 내 부족 단위의 무장세력들을 비교적 느슨하게 조직화한 단체다. 아프간 탈레반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면, TTP는 종파주의ㆍ부족주의 성향이 눈에 띈다.
2014년 3월 니사르 알리 칸 파키스탄 내무장관의 보고에 따르면 2008년 이래 약 6년간 1,710명이 종파 폭력으로 목숨을 잃었다. 종파폭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남서부 발로치스탄주 퀘타시는 2010년 9월 시아파 겨냥테러가 발생한 이후 ‘시아파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테러가 가장 빈번한 도시로 전락했다. 발로치스탄 지역의 희생자 다수는 하자라족이다. 몽골계 소수민족인 하자라족은 시아파이자 아프간 난민으로, 파키스탄 사회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집단이다. 자마툴 아흐라르나, 또 다른 수니파 무장조직 ‘라슈카레 장그비’는 이처럼 사회적 약자나 민간인을 겨냥해 끊임없이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종파 폭력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종파 폭력이 현재의 지경에 이르기까진 세 번의 역사적 기점이 있었다. 첫 기점은 1979년 구소련의 아프간 침공이다. 이후 10년간 아프간이 대소 항쟁의 최전선이 되면서 이웃국가인 파키스탄은 자연스럽게 세계에서 모여든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주의자)들의 기착지이자 피난처가 됐다. 이 과정에서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으로 수니파 근본주의 사상인 와하비즘도 급속도로 전파됐다. 당초 와하비즘은 ‘무신론자’ 구소련에 대항한 무기로 차용됐으나, 동시에 시아파 등 소수 종파에 대한 증오를 키워 종파 폭력의 원천이 된 것이다.
다음은 2001년 9ㆍ11테러다. 1980년대 말 아프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사마 빈 라덴 등 아랍권 출신 지하디스트들은 아프간-파키스탄 접경 지역에 남아 알카에다와 같은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하지만 9ㆍ11테러 후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이 지하디스트들이 일순간 파키스탄으로 넘어왔다.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세력이 바로 TPP 소속 부족들이다. 파키스탄 내 극단주의 세력은 이후 두 흐름으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미국과 서방을 공격대상으로 삼는 ‘글로벌 지하디즘’, 다른 하나는 수니파 대 소수 종파 구도의 ‘파키스탄 종파주의’다. 파키스탄 종파 폭력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 때다.
종파 폭력이란 불에 기름을 부은 마지막 사건은 2003년 이라크전이다. 이라크전으로 사담 후세인(수니파) 정권이 붕괴, 시아파 세력이 집권하자 이웃 국가들의 수니파 세력은 오히려 이를 보복의 기회로 활용했다. ‘시아파가 미국과 손잡고 수니파를 전복했다’는 종파주의 세력의 논리는 글로벌 지하디스트까지 자극해 잇따른 테러로 이어졌다. 결국 파키스탄 종파주의는 예멘, 시리아 등으로 옮겨 붙으며 무슬림 ‘세계 내전’을 격화하고 있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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