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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심오롭고 공허한

입력
2017.05.1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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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히 진리를 기다리며 물음표의 존재 안에서 앉아 숨 쉬는 것.’

성공회 신학자이자 104대 캔터베리 대주교인 로완 윌리엄스는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이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저 문장을 두고 ‘심오롭다’고 놀린다. 심오한(profound) 것 같지만 사실은 별 뜻 없지 않으냐는 야유다. 데닛이 심오로움(deepity)의 다른 예로 드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사랑은 단어일 뿐이다.’

아, 그렇지. ‘사랑’은 물론 단어다.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거지? 그런 식으로 따지면 맛있는 ‘치킨’도 단어일 뿐이고 끔찍한 ‘범죄’도 단어일 뿐이잖은가? ‘사랑은 단어일 뿐이다’라는 말은 문장일 뿐이고?

미국 철학자들은 이런 심오로움을 몹시 싫어하는 모양이다. 예일대의 셸리 케이건 교수는 할리우드 영화에 가끔 나오는 대사를 물고 늘어진다.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고? 아닌데. 비행기 사고가 나면 다 같이 죽는데.

아, 그게 아니라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의미를 가진 사건으로서 다가온다는 의미라고? 그런데 그건 뭐든 그렇지 않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식사도 영화감상도 모두 홀로 하는 거지. 친구랑 같이 밥을 먹어도 음식 맛은 혼자 느끼는 거니까. 그러니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는 경구는 별로 가리키는 바가 없는, 무의미한 아포리즘이라는 얘기다.

소설가인 나는 이 문제에 철학자들보다는 열린 마음이다. 로완 윌리엄스의 신앙 고백이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누가 설명을 요구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앉아서 고요히 숨쉬며 진리를 기다린다’는 묘사는 분명 내게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물음표의 존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표현 자체가 멋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철학과 문학이 갈라선다.

문학이 싫어하는 것은 ‘심오로움’이라기보다는 ‘진부함’이다. ‘사랑은 단어일 뿐이다’는 말은, 물론 텅 비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너무 뻔하기 때문에 형편없는 문장이다.

어떤 문장들은 뻔하고 공허한 주제에 위험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는 대사를 읊는 할리우드 영화의 조연 캐릭터들 운명이 어떤지 아는가? 대개 저 말 하고 나서 몇 분 뒤에 죽는다.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이때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는 말은 자멸적 허세에 불과하다. 발화자는 그 말에 취해서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 자신이 무척 용감한 사람이고 그 순간이 굉장히 비장한 상황인 듯한 착각, 다시 말해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런 심오로운 문구들은 요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여러 가지로 플랫폼과 궁합이 잘 맞는다. 길이가 짧아서 퍼지기 좋고, 사람을 들뜨게 해서 비록 잠시지만 특별한 경험을 한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플랫폼 이용자들도 대개 인생 경험이 풍부한 편은 아니고, 자기표현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많은 걸로 안다.

대체로 SNS에 올라오는 글들은 내용이 심오로울수록 ‘좋아요’나 리트윗 횟수가 더 많아지지 않나 싶다. 거기까지는 오케이. 문제는 그 중 위험하거나 해로운 녀석들이다. 예를 들어 이런 거.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한다.’

이 문장의 심오로움 지수는 아주 높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단 가능하지가 않다. 나는 죽을 때까지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구분하고 서로 다르게 대우할 것이다. 삼겹살과 돼지껍데기에 대해서도 그렇다.

아, 사람에 대한 얘기라고? 그런데 장학생을 선발할 때에는 가정형편에 따라 학생들을 차별해야 하지 않을까? 형사재판을 할 때에는 저지른 죄에 따라 범죄자에게 서로 다른 벌을 내려야 하지 않나?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모든 형태의 차별에 맞서겠다’는 결의가 아니라 ‘그 차별이 어떤 형태냐’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차별을 둘러싼 가장 첨예한 논쟁들은 차별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벌이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차별인가에 대한 해석이 다른 사람들이 벌이고 있다. 소수자우대정책을 찬성하는 이들은 소수자를 우대하지 않는 것이 차별이라고 주장하고, 반대편 진영은 소수자 우대가 차별이라고 반박한다.

이런 때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한다’는 심오로운 선언은 어떻게 쓰이나. 특히 SNS에서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질문과 토론을 막는 모양새로 쓰인다. 너희와 달리 우리는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편은 이렇게나 많다! 그런 느낌이다. 이런 여건에서 숙의(熟議)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우리는 얼마 전 급작스럽게 선거를 치렀고, 심오로운 슬로건들을 어느 때보다 많이 봤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신조어가 입에 오르내렸다. 과문한 나는 그게 몇 십 년 전 유행어였던 ‘제3의 물결’과 근본적으로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적폐청산’이라는 말은 어떤가. ‘적폐’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가, 아니면 ‘청산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결의에 무게중심이 있나. 아직까지는 꽤나 심오로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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