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 치밀한 전략, 조국의 어두운 역사.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7일(현지시간) 프랑스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에마뉘엘 마크롱(39) 후보의 승리 요인을 이 세 가지로 압축했다. 공화ㆍ사회 양당 유력 대권 주자들의 몰락 속에 좌도 우도 아닌 중간지대를 선점해 대중 속으로 파고든 빠른 판단, 프랑스 사회의 뿌리 깊은 극우 혐오 등 복합적 변수들이 어우러져 압승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입소스프라 등에 따르면 마크롱 당선인은 1차 투표에서 각각 19.6%, 6.4%를 득표한 극좌 장뤽 멜랑숑 후보와 사회당 브누아 아몽 후보 등 진보성향 지지자들의 절반 이상(52%, 71%)을 흡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중도 우파인 공화당 프랑수아 피용(20%) 후보의 표도 48%나 가져갔다. 상대적으로 극우정당 국민전선(FN) 마린 르펜 후보의 멜랑숑, 아몽, 피용 흡수표는 각각 7%, 2%, 20%에 그쳐 승패를 가른 결정적 요인이 됐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당초 멜랑숑 지지표가 르펜에 쏠릴 것이란 예측은 기우였다”며 “멜랑숑 지지자들의 3분의 1이 기권하기는 했으나 대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고 분석했다.
마크롱 당선인이 손쉽게 좌우 지지층을 확보한 것은 거대 좌우 정당이 자멸한 탓이 크다. 선거 초반 지지율 선두를 달리던 피용 후보는 선거 기간 내내 ‘세비 횡령’ 스캔들에 발목이 잡혀 추락을 거듭했고, 당초 사회당 대선 후보로 유력했던 마뉘엘 발스 전 총리 대신 지명도가 훨씬 떨어졌던 아몽 전 교육장관이 도전자로 나선 점도 호재였다.
/
중도를 지향하며 좌우를 넘나드는 실용주의 행보도 부동표를 껴안는 데 한 몫했다. 마크롱은 부자증세 등 진보적 가치를 견지하면서도 주 35시간 근로제 완화, 법인세율 인하(33.5%→25%) 등 계속된 경제 위기를 감안해 노동ㆍ복지 분야에서 확실히 ‘우클릭’한 관점을 표방했다. 실제 투표성향 분석 결과, 학력과 소득이 높아질수록 마크롱의 득표율도 올라갔다. 특히 대학 3학년 이상을 수료하고 월 소득 3,000유로가 넘는 고학력ㆍ고소득 유권자층에서 그는 각각 81%, 75%의 몰표를 받았다. 영국 BBC방송은 “마크롱은 사회당 정부에서 경제장관을 지내면서 집권당 후보로 나설 경우 실패를 예감하고 시민과 직접 소통하는 정치운동에 주목했다”고 전했다. 마크롱의 정치조직 ‘앙마르슈!’는 2008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풀뿌리 시민운동을 본 떠 2만5,000여명의 유권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여론을 취합한 뒤 정책을 가다듬었다.
“극우 후보는 안된다”는 프랑스 특유의 정치현상 ‘공화국 전선(Front republicain)’도 어김없이 작동했다. 마크롱은 도시, 농촌과 직군을 가리지 않고 전 지역ㆍ계층에서 르펜에 우위를 점했다. 반(反) 세계화ㆍ유럽연합(EU)을 공언한 르펜은 FN의 거점인 북부 지역과 난민 문제에 민감한 남부 일부 해안도시에서 강세를 보였을 뿐이다. NYT는 “르펜은 FN에 덧씌워진 극단ㆍ인종주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애썼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4년간 나치 지배 경험이 있는 프랑스인들에게 극우는 여전히 ‘악마’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거꾸로 극우 혐오라는 반작용에 힘입은 승리는 마크롱에게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이란 평가다. 이번 결선투표의 기권율은 1969년 이후 최대치인 25.3%를 기록할 만큼 프랑스 유권자들의 정치환멸은 심각했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마크롱을 찍은 상당수는 그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르펜을 저지하기 위해 현실적 선택을 한 것”이라며 ‘쓸쓸한 승리’로 평가절하했다. 마크롱이 명확한 개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내달 11,18일 치러질 총선에서 패할 경우 프랑스 정치권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이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