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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팽크허스트의 딸들

입력
2017.05.0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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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3월 어느 날, 런던 피카딜리 거리의 주요 건물 유리창들이 와장창 박살이 나버렸다. 한 무리의 여성들이 일사불란하게 거리로 나와 벌인 행동이었다. 시끄러운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성공회 교회에 불을 싸지르고, 신사들의 전용 놀이터인 골프장으로 몰려가 그곳 시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우체국에 들어가 쌓여있던 편지를 불태우고, 의회에 난입해 연설중인 정치인의 얼굴을 할퀴고, 조세저항 운동을 주도하고, 고결하신 왕실 나리들의 시야에 곧장 들어갈 수 있도록 버킹엄 궁 난간에 몸을 매단 채 자신들의 요구를 소리 높여 외쳤다. 여성사회정치동맹(WSPU: 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이라는 단체가 주도하는 아찔하고 과격한 시위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라”.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여성 참정권 문제는 19세기 중반 이후 존 스튜어트 밀을 선두로 하는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된 이슈였다. 그 무렵 생겨난 여러 여성운동 단체도 남녀 간 차별 없는 참정권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정부의 법 테두리에서 ‘시민’의 범주에도 들지 못한 여성에게 참정권 운운은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쯤으로 치부되었다. 더구나 절대 권력자인 빅토리아 여왕이 누구보다 완고한 여성운동 반대론자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는 현실이었다.

젊은 시절 열렬한 사회운동가로 활동해온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급진적 여성운동가로 세상에 재등장한 것은 순전히 세 딸 때문이었다. 사상적 동지였던 남편을 잃은 뒤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내던 그녀는 잘 자란 딸들이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에 직면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다시 일어섰다. 1903년 뜻을 같이하는 여성들로 구성된 WSPU를 설립한 뒤, 말로는 안 통하는 완강한 세상을 거칠게 흔드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파하자고 결의한 것이다.

잘나신 영국 신사들은 가차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그녀들의 절규에 강도 높은 진압과 여론전으로 맞섰다.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몰지각하고 위험한 여자들”. 야멸차게 찍어 누르면 사그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경찰의 폭력 수위가 높아질수록 팽크허스트와 그 친구들의 투쟁 방식도 점점 정교하게 뻗어나갔다.

이 위험하고 지난한 투쟁 속에서 수많은 여성이 다치고 불구가 되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팽크허스트에게도 여러 번 위기가 찾아왔다. 온갖 폭력 시위를 주도하며 제집마냥 감옥을 들락거렸고, 1913년 한 해에만 무려 열두 차례의 목숨 건 단식 투쟁을 강행했다.

그러는 10여 년 사이 영국 사회에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 분란과 위험을 조장하는 걸로만 여겨지던 여성들의 목소리도 대중의 의식 속에서 서서히 상식으로 각인되기 시작했고 여성 납세자에 한해, 30세 이상 여성에 한해 부분적으로 확대되던 참정권이 1928년 남녀 동등하게 부여되는 보편적 권리로 인정되었다. 지난해 ‘서브러제트’라는 제목의 영화로 국내에도 소개된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친구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어떤 역사적 물줄기를 돌아 지금 이곳까지 당도했는지 두고두고 숙고하게 한다.

불 같았던 겨울을 거쳐 대통령 선거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장미 대선’이라 이름 붙인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알싸한 장미향은커녕 미세먼지 부옇게 낀 듯 갑갑한 마음을 호소하는 지인이 부쩍 늘었다. 현실은 늘 이렇게 지나친 기대로 판명이 나고 마는 건가, 꼴불견 TV 토론을 지켜본 후 낙담하는 친구 옆에서 불쑥 팽크허스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떻게든 친구를 격려할 동력이 내게도 필요했던 것 같다. 마침 인근에 사전투표소가 있었다. 함께 들어가 투표를 했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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