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도의 역사사회학
이시하라 슌 지음ㆍ김이인 옮김
글항아리 발행ㆍ288쪽ㆍ1만8,000원
‘지리적 심상’은 너무 고상한 표현이니까, 조금 더 시니컬하게 ‘지도 펴놓고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읽어내려는 욕망’이라 해두자. 이 욕망이란 참 오묘한 구석이 있다. 가령 일본은 우리를 ‘반도’(半島)라 부른다. 너희들 사실 섬 같은 존재 아니냐는 얘기다. 딱히 틀렸다 하긴 뭣한데, 그러면서 스스로는 ‘열도’(列島)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더 나아가 20세기 초, 힘 좀 쓰던 제국주의 시대 때 스스로를 ‘내지’(內地)라 불렀다. 마치 본국 중심으로 주변 식민지가 땅으로 다 이어져 있기라도 한 듯 말이다.
‘군도의 역사사회학’은 바로 이 ‘내지 인식’에 대한 비판이다. “내지를 일종의 의사(擬似) 대륙으로 간주하는 역사인식” “내지를 서구나 북미와 나란히 대륙세계의 중심인 것처럼 다루는 인식” 같은 것들이 “동아시아인에 대한 적개심과 함께 일본의 옛 식민지 출신자에 대한 퇴행적 인종주의를 반복적으로 드러내”도록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로 저자는 내지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섬의 입장에서 일본 현대사를, 그리고 이 현대사에 스며든 미국의 입김을 음미한다. 이 정도 틀을 갖춘 스토리는 오키나와의 비극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 익숙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의 강점, 그리고 이 책의 재미는 저자가 오키나와 너머 더 멀리 나갔다는 데 있다.
저자의 탐구대상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1,000㎞ 내려가야 하는 오가사와라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다시 200㎞쯤 더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이오 열도다. 원래 무인도에서 시작했고, 섬의 규모나 정주 인구 자체가 적었던 이 섬들은 오키나와에 비해 덜 주목 받았고, 더 빨리 잊혀졌다. 어떻게 보면 가장 약한 고리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동시에 국가가 너무 싫은 나머지 국가 이전, 혹은 국가 바깥에 있다고 하면 덮어놓고 자율, 탈주 같은 낭만적 단어들로 치장해대지 않는 저자의 태도도 좋다. 가령 태평양에서의 ‘해적되기’(Becoming Pirates)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해적들의 반권위주의와 평등주의적 성향을 일반화ㆍ낭만화할 위험이 있다”고 선선히 인정한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노마드’ 개념을 끌어들이면서도 그 설명틀을 “사고하기 위한 이론적 개념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 절제력도 좋다.
오가사와라 제도, 이오 열도는 고래 등을 쫓던 원양어선 선원들에게 발견됐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이 이들 지역을 교두보 삼아 태평양 지역 진출을 꿈꾸면서 재발견됐다. 이 섬에 처음 들어온 이들은 낙오자, 도망자, 추방자, 해적 등이었다. 이들이 글로벌 자본주의 세계에 통합되면서 비치코머(beachcomberㆍ해변가를 끼고 이런저런 잡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 블랙버더(blackbirderㆍ태평양 지역 노예 상인들) 등으로 변해갔다.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이 노예 무역망은 링컨의 노예 해방 때문에 노예제 농업의 기반을 잃어버린 미국 남부의 농장주들까지 참여할 정도로 광범위했다. 이들로 인해 발생한 태평양 지역 디아스포라(민족 이산)는 10만명을 훌쩍 넘긴다. 소설가 허먼 멜빌, 잭 런던의 고래사냥 이야기, ‘존 만지로 표류기’의 주인공이자 ‘근대 일본 건설의 공로자’라 불리는 존 만지로의 인생역정, ‘악랄한 인신매매 브로커’ 벤저민 피즈의 변화무쌍한 인생 얘기 등 읽을 거리들이 흥미진진하다.
이 때쯤이면 등장할, 이 모든 걸 이론적인 언어로 세련되게 포장해주는 ‘지식인’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최초의 정치경제학자라 불리는 다구치 우키치는 남양(南洋)이야말로 일본의 자유무역지대가 되어야 하고, 오가사와라 제도 같은 곳을 자유무역항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가사와라 제도를 비롯한 태평양의 이름 없는 작은 섬들은 이제 일본제국 영광을 위한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변방에 자리한 군도의 운명이란 늘 그렇듯, 일본이 공세적일 때는 ‘디딤돌’이 되지만 수세적일 때는 ‘버리는 돌’이 된다. 패전에 몰린 일본은 이 섬들을 철저히 버린다. 이 ‘버린 돌’을 주워서 ‘디딤돌’로 재활용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건 미국이었다. 바뀐 건 디딤돌이란 운명이 아니라 ‘대륙에서 바다로’에서 ‘바다에서 대륙으로’라는 디딤돌의 방향뿐이다.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냉전이다.
이미 한일간 분쟁, 중일간 분쟁이 끊이지 않는 독도와 센카쿠 열도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대륙봉쇄’라는 미국의 전략적 판단 때문이라는 정병준(이화여대)ㆍ개번 매코맥(호주국립대)의 연구가 있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 일본과 소련간 ‘북방영토문제’ 협상이 실은 미국의 압력으로 무산됐다는 얘기도 소개해뒀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섬들을 그렇게 추켜세우고, 버리고, 다시 주워서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전선의 총알받이로 내몰리고, 아무런 보상이나 도움없이 본토로 소개 당한 뒤 귀환길이 막히는 바람에 끔찍한 굶주림을 겪어야 했던 섬의 원주민들이다. 결말의 제목 ‘지정학을 넘어 계보학으로’는, 섬들이 지정학적 판단에 따라 거대한 싸움판의 바둑돌처럼 소모돼서는 안되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를 껴안아야 한다는 호소를 담고 있다. 이렇게 신나게 일본을 두드리고 나면, 그런데 우리에겐 내지 의식이 없을까, 궁금해진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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