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딸이 열둘, 이원숭 어르신의 특별한 팔순 잔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딸이 열둘, 이원숭 어르신의 특별한 팔순 잔치

입력
2017.05.02 21:46
0 0
딸과 사위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포즈를 취했다.
딸과 사위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포즈를 취했다.

“이제는 힘든 일 그만하시고 즐기면서 사세요. 아들은 대학교수님이고, 딸들 모두 자상한 배우자들 만나서 남들 부러워할 정도로 잘 살고 있는데 이제부터는 좀 누리고 사세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리 곁을 지켜 주세요. 사랑합니다!”

4월8일 안동 리첼 호텔에서 열린 이원숭 어르신의 팔순 잔치에서 진행한 편지 낭독 순서였다. 편지를 마저 읽기 전에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편지를 낭독한 사람은 친딸이 아니었다. 조카딸이었다. 팔남매의 대표로 낭독에 나선 이정(49)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작은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 엄하지만 사려 깊으셨던 아버지

어르신의 친딸도 여섯이다. 조카딸까지 더하면 모두 열둘이다. 어르신의 형제는 경북 안동 도산면 단천동에서 이웃해 살았다. 형님네는 8남매, 동생네는 7남매, 면에서 딸부자 형제로 통했다.

워낙 보수적인 지역이라 딸들이 어릴 때만 해도 ‘아들, 아들’ 노래를 불렀다. 이 어르신은 일찍 아들을 얻었지만 ‘하나만 더’하는 마음에 계속 놓다 보니 딸만 여섯이었다. 둘째 이진교(46)씨는 “딸 많은 게 딸들도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어릴 때 집에 아버지 친구나 지인이 오시면 딸만 여섯이 주르르 나와서 인사를 하는 걸 보시고는 다들 입을 쩍쩍 벌리셨죠. 큰집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죠, 호호!”

안동 사람답게 엄하게 예절 교육을 시켰지만 목소리가 담장을 넘긴 적이 없었다. 늘 사려 깊었다. 한번은 아들이 방황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봄에 “공부하기 싫다. 농사 짓고 살겠다”면서 대구에서 불쑥 집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여느 집 같으면 불호령이 떨어졌겠지만 아버지는 “그래, 같이 농사 짓자”하면서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다음 날부터 농부 체험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아들을 새벽 다섯 시에 깨워서 밖에 데리고 갔다. 중참을 줘가면서 저녁까지 일을 시켰다. 여느 농부처럼 똑같이 일거리를 줬다. 그러자 사흘 만에 아들 입에서 곡소리가 나왔다.

“아이고, 아부지. 나 인자 공부할랍니더. 아부지가 이래 고생해가 농사짓는 줄 몰랐심더!”

전문대 진학도 어렵다는 성적은 몇 달 뒤 수직 상승해서 4년제 커트라인을 너끈히 넘겼다. 이후 계속 공부에 매진해 지금은 중국 윈난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딸들은 “속을 끓이면서도 차분하게 대응하신 부모님의 지혜 덕분에 하나뿐인 아들이 교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엄하셨지만 언제나 웅숭깊은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팔순 기념 잔치에 일가친척이 모두 모였다.
팔순 기념 잔치에 일가친척이 모두 모였다.

- 여름휴가는 무조건 친정에서

딸들의 이상형은 아버지였다. 여섯 딸이 모두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털어놓았을 정도였다. 저마다 아버지와 가장 비슷한 남편을 얻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들을 더 낳지 못한 아쉬움도 수그러들었다. 딸들이 워낙 잘했다. 언젠가부터 “딸이 많아 좋다”, “딸부자가 최고 부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아들 많은 집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화목하다. 농번기에는 주말마다 사위들이 내려온다. 자주 오는 사위는 한 달에 두세 번 얼굴을 비추기도 한다. 조카딸들도 한번씩 들른다. 날 풀리는 즈음부터 가을걷이 때까지 늘 사람들이 북적댄다. 이 어르신이 팔순을 넘긴 나이에 벼농사에다 고추, 수박까지 짓는 비결이다.

특히 휴가철에는 집이 미어터진다. 지난해에는 딸과 사위, 손자, 손녀까지 30여명이 그 작은 시골집을 복작복작 채웠다. 낮에는 밭에 나가서 일을 하거나 물놀이로 소일하고 밤에는 마당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방 두 개에 거실이 딸린 작은 시골집이어서 잠자리도 만만찮았다. 방이 비좁아 칼잠을 청해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법이 없다. 딸들은 입을 모아 “매년 휴가 때마다 시골집에 모이는데 올해도 여름철에는 딸 부잣집 여름잔치가 벌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여름이면 안동 시골집 마당에서 삼겹살 파티가 벌어진다.
여름이면 안동 시골집 마당에서 삼겹살 파티가 벌어진다.

- 둘째 딸이 준비한 깜짝 선물 ‘기웅 아제’

팔순 잔치에는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지역 민방 TBC의 인기 방송인 ‘기웅 아제’ 한기웅씨를 MC로 초청했다. 한씨는 둘째 이진교씨의 간곡한 부탁에 바쁜 일정을 조절해서 안동까지 달려왔다.

“제가 부모님 속을 제일 많이 썩였거든요. 그래서 한번이라도 꼭 효도하고 싶다고 간곡하게 청했더니 흔쾌히 오시겠다고 하더라고요. 기웅 아제가 어려서 어머니 잃고 홀로 남은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잘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천생효자가 사회를 보면 잔치가 더없이 빛날 것 같아 체면 무릎 쓰고 매달렸죠. 너무 고마워요!”

2시간 가까이 팔순 잔치를 진행한 한씨는 “딸들이 진정으로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 같아 행사를 진행하는 내내 너무 흐뭇했다”고 말했다.

“제일 인상 깊었던 분들이 조카딸들이었습니다. 서울, 경기도에 사시는 분도 있었는데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거 보고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딸이 열둘이라고 해서 그냥 하는 말이겠지 했는데, 하는 거 보니까 친딸 못지 않았습니다. 어르신의 형님이 살아 계실 때 그렇게 우애가 좋았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딸들이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았습니다. 진짜로 딸이 열둘, 딸부자 어르신 맞대예!”

이 어르신은 잔치가 끝난 후 더 바빠졌다. 잔치에 참여했던 친지며 이웃들이 “어르신 덕에 맛난 밥도 잘 먹고 최고 스타가 진행하는 잔치도 구경하고 너무 좋았다”면서 돌아가면서 밥을 사고 있다고 했다.

이진교씨는 “평생 한 마을에서 같이 살면서 정을 나눈 이웃들도 함께 와서 즐겁게 노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면서 “앞으로 언니, 동생들과 아버지를 살뜰하게 모시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사연을 듣고 안동까지 달려와 사회를 맡아준 방송인 한기웅씨(가운데).
사연을 듣고 안동까지 달려와 사회를 맡아준 방송인 한기웅씨(가운데).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직접 제보하실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리며, 진실한 취재로 보답하겠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