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36.5]못된 어른들이 만든 미친 세상

입력
2017.05.02 04:40
0 0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CJ E&M 앞 광장에서 열린 CJ E&M 신입 조연출 故 이한빛 PD의 어머니가 사망사건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CJ E&M 앞 광장에서 열린 CJ E&M 신입 조연출 故 이한빛 PD의 어머니가 사망사건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홈쇼핑 회사에서 일하다 심장마비로 숨진 30대 청년 정모씨에게 업무상 재해를 인정한 판결이 내려졌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사망의 원인. 한 주에는 23시간, 또 한 주에는 26시간, 사망하기 전 주에는 36시간 가량의 초과 근무를 해야 한 정씨였다. 한창 때의 30대 젊은이가 과로로 숨졌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고, 주5일 기준으로 하루 7시간 정도를 더 일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이틀 전,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센터에서는 고(故) 이한빛 프로듀서(PD)의 시민추모문화제가 열렸다.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 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지난해 10월 고인은 유서에 이런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너무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아.” 죽기 전 고인이 친구에게 남겼다는 말이, 그의 죽음을 전해 듣고부터 머리 속을 떠나지 않던 참이었다. 그가 몸담았던 CJ E&M 본사 앞으로 고인을 생각(追)하고 슬퍼(悼)하기 위해 몰려든, 500명 가까운 사람들 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부러워할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지금도 수많은 청년들이 선망하는 PD라는 직업을 가졌으면서, 게다가 이제 막 사회를 알아가고 사람을 알아가기 시작한 20대 후반의 청춘이면서, 죽을 만큼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고인의 죽음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그 바닥’의 불합리한 일상이 드러나고 있다. 유족과 동료들은 살인적인 촬영 스케줄과 폭언 등이 난무한 문자메시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울렸던 그의 휴대폰 수신기록을 내밀었다. 입사 후 55일 동안 그가 쉰 날은 단 이틀이었다.

추모제에서 한 드라마 3년 차 스태프는 “6일 동안 누워서 잠든 시간이, 6시간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대책위에서 설문한 방송 드라마제작 종사자 100여명의 대답도 다르지 않았다.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20시간, 많을 땐 23시간 일을 한다고들 했다. 일한 만큼의 대가는? 시청률에 따라, 성과급이 지급되는 구조로, ‘그 바닥’ 주변에서 누구에게도 “충분히 받고 있다”는 답은 듣지 못했다.

그는 분명 일 앞에서 허덕였을 것이다. ‘이제 좀 쉬자’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나 좀 힘들어”라고 얘기하면 “너만 힘든 게 아니야”라는 답이 되돌아왔을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우리 모두가 힘드니까. 육체적 고통은 신경을 한껏 곤두세워, 서로의 짜증으로 다툼도 종종 벌어졌을 것이다.

누군가는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인정한다. 사실 우리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다. 그의 삶이,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내 주변의 청춘들이 견뎌내고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지금은 힘들지만, 네가 살아가는데 좋은 경험이 된다”는 말로, “원래 이 바닥이 그래. 버티는 것도 능력”이라는 이유로, “사람이 없으니 네가 한 발 더 뛰어야지”라는 논리로, “하겠다는 사람 많으니 못 하겠으면 나가”라는 엄포로. 어른들이 만들어놓고 지시하는 세상에서 우리 청춘들은 정당한 대가도 받지 못한 채 땀과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정말 돌아버리겠네”라는 말, 어제도, 그제도, 지난 주에도 너무나 쉽게 들은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의 죽음을 개인의 비극으로 보면 안 된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들이다. 죽기 전 “여긴 미친 세상이야”라고 했다는 이 PD의 말에, 우리 어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미친 세상을 만든 못된 어른들, 특히 ‘난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남상욱 사회부 기자 thot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