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음악을 오케스트라의 실연으로 듣는 공연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픽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대표작 명장면을 담은 영상을 보면서 오케스트라의 실연으로 OST를 들을 수 있는 ‘픽사 인 콘서트’가 내달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8, 9월에도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와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무대가 예정돼 있다.
그렇다면 무대 뒤 스크린에 영화 대신 게임 속 장면이 등장한다면 어떨까? ‘리니지’에 등장하는 용인 ‘린드비오르’가 날아와 착지한 뒤 포효한다든가, ‘블레이드앤소울’에 등장하는 홍석근과 진서연이 ‘귀천검’을 차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는 것이다. 상상 속에선 여전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두 조합을 내달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만날 수 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게임 속의 오케스트라’ 공연에 나선다.
영화음악 거장도 참여해 만드는 요즘 게임음악
전자음이 ‘뿅뿅’ 거리는 소리를 요즘 게임음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최근에 작곡된 게임음악은 영화음악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웅장함을 자랑한다. 사람의 목소리도 가미되고, 해금이나 가야금과 같은 국악기는 물론 아일랜드의 전통 관악기인 틴 휘슬 등 생소한 악기도 투입된다.
엔씨소프트에서 만든 무협 콘셉트의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인 ‘블레이드앤소울’에는 무려 1,071곡의 음악이 삽입 돼 있다. 게임 속 장소마다 모두 다른 곡이 나오게 하기 위해 다양한 곡을 작곡했는데 각 장소에 맞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해금과 가야금, 틴 휘슬 등을 넣었다. ‘블레이드앤소울’의 음악은 실제 100여명의 연주자가 참여해 일본 도쿄에서 3개월 동안 녹음됐다. 이번 코리안심포니 공연에서는 가야금 소리 대신 하프로 편곡 돼 연주된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되는 20여곡 중 15곡의 편곡을 맡은 김애라(37) 편곡자는 “게임음악은 대체로 비슷한 드럼 루프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 곡들은 영화음악 같은 스토리도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가 꼽은 아름다운 곡은 재일동포 작곡가 양방언이 총감독을 맡은 ‘아이온’의 음악이다. 음악에 사용된 화성은 단순하지 않고 리듬도 다채롭다. 김 편곡자는 “최근에 나온 곡일수록 다양한 악기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고, 잘 쓰이지 않는 8분의 7박과 같은 박자가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소규모 스튜디오에서 한 두 명이 음악 작업을 맡았던 예전과 달리 게임음악도 팀이 꾸려질 정도로 음악에 심혈을 기울인다.
최근 출시된 넷마블게임즈의 모바일 게임 ‘펜타스톰’ 배경음악은 세계적인 거장 한스 짐머의 손에서 탄생했다. 짐머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인터스텔라’, ‘다크나이트’ 등의 음악을 작곡해 그래미어워즈와 골든글로브 시상식 등에서 여러 상을 수상한 영화음악 작곡가다. 모바일 게임의 배경음악도 무게감 있는 곡으로 만들어낸 짐머는 76명의 관현악 연주자와 11명의 타악기 연주자와 함께 녹음했다.
해외에서도 게임음악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일본 게임 ‘파이널 판타지’ 음악을 주제로 한 콘서트가 열리고, 영국 런던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파이널 판타지’, ‘앵그리버드’, ‘워크래프트’ 등 인기 게임음악 22곡을 모아 2011년 앨범까지 발매했다.
쉽지 만은 않은 악보 제작기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면서도 게임음악을 콘서트홀에서 연주할 것이라고는 제작자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을까. 음악을 정제된 악보로 정리해 둔 경우가 거의 없어 악보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또 정통 클래식과 달리 게임음악은 컴퓨터로 전자음을 뽑아내는 미디(MIDI)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 실제 연주를 위한 악보화가 쉽지만은 않았다. 연주자들이 볼 수 있도록 악상기호를 새로 집어 넣는 것도 편곡자의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임음악의 오케스트라 총보는 “악보를 만들어 놓으니 거의 교향곡 수준”(김애라 편곡자)이다. 김 편곡자는 “영화음악 거장인 존 윌리엄스나 뮤지컬 작곡가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작품들이 200년 후에 오늘날의 클래식음악으로 재조명되지 않을까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편곡 작업을 하면서 게임음악도 한 부분이 될 수 있다고 느꼈다”고 덧붙였다.
관객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한 변주
오케스트라가 정통 클래식이 아닌 다양한 대중음악을 변주하는 이유는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한 목적이 크다. 가수들이 노래 경연을 펼치는 최근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기존의 가요도 오케스트라 반주로 편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중들에게는 오케스트라의 매력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 이제는 코리안심포니나 서울시향 등 오케스트라가 대중적인 음악을 연주하고, 성악가들도 오페라의 아리아뿐만 아니라 가요나 민요 등을 편곡해 부르려는 시도를 한다. ‘게임 속의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는 뮤지컬 ‘팬텀’에서 주인공을 맡기도 했던 소프라노 김순영이 노래한다. ‘블레이드앤소울’ 배경음악 ‘바람이 잠든 곳으로’는 소프라노의 음역대에 맞춰 원곡보다 3도를 높였다.
클래식 음악을 주로 연주해 오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이러한 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코리안심포니 관계자는 “단원들이 영화음악도 자주 연주해 본 만큼 다양한 시도에 열려 있어 새로운 편곡을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애라 편곡자도 “처음 편곡을 시작하던 15년 전만 해도 영화음악은 클래식 음악이 아닌 소위 ‘딴따라’로 보는 시선이 강했는데 이제는 많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연주회는 교향곡, 협주곡뿐만 아니라 영화음악 등 폭넓은 프로그램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휘자 이병욱이 지휘봉을 잡는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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