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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누고, 생각하고... 걷다 보면 삶이 보인다

입력
2017.04.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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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판타지아

골목 거닐며 얘기 나누는 남녀

그 골목 속엔 무엇이 있었을까

●최악의 하루

“내 소설은 이 길에서 시작돼요”

그 순간 현실의 길들이 지워져

●경주

사방에 능이 있는 ‘죽음’의 장소

삶도 죽음도 아닌 곳을 헤매다

오래 전 술버릇 중 하나가 무작정 걷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택시비가 없어서 걷기 시작했는데, 음주 보행에 재미를 붙이다보니 나중에는 수중에 돈이 있어도 무조건 걸었다. 술을 먹고 걷다보면 술이 깬다는 (이것이 과연 장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점도 있고 평소에 보지 못하는 새벽의 풍경도 만끽할 수 있었다. 산뜻한 공기를 해장국 삼아 들이마시면 온몸의 술기운이 이슬로 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순간이 하나 있다. 문제의 그날도 나는 강남 어딘가에서 술을 마신 후 무려 3시간을 걸어 한강 다리를 건넜다. 목이 말랐다. 요즘처럼 편의점이 많은 시절도 아니었기 때문에 새벽에 문을 연 가게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물이 필요할 때는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수돗가를 자주 이용했는데, 그날은 학교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교회 하나를 발견했다. 예배당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새벽 기도를 시작할 시간은 아니었다. 나는 교회 앞마당의 사과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큼지막한 사과 하나를 따서 옷에 문질러 닦은 다음 한입 크게 베어 먹었다. 과즙이 사방으로 퍼졌고, 갈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래서 네가 아담이라도 됐다는 거야? 사과가 상징하는 게 뭐야? 뱀은 어디 있었는데?”라고 묻곤 하는데, 그런 얘기가 아니다. 실제로 교회 앞마당에서 사과를 따 먹은 얘기다.

문이 열리고 교회에서 누군가 걸어나왔을 때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도망가긴 어쩐지 어색하고, (겨우 사과 하나 먹었을 뿐이다) 인사를 하기도 뭔가 겸연쩍고, (사과 좀 같이 드실래요?) 몸을 숨기기에는 내 몸이 너무 컸다. 걸어 나온 사람은 교회를 지키는 집사였다. 집사는 나를 혼냈다. “학생이… 여기 교회에서… 함부로 이런 걸 따먹고…” 같은 말들만 겨우 기억난다. 나는 사과를 다 먹지도 못하고 교회를 빠져 나왔다. 사과나무가 있던 교회는 사라졌지만, 그 동네를 지날 때마다 교회 앞 사과나무가 생각난다. 갈증이 나기도 한다. 하염없이 걷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차를 탄 사람의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은 추상화에 가깝지만, 걷고 있는 사람에게 보이는 풍경은 세밀화와 같다. 나뭇잎의 색깔과 공기의 온도와 바람의 냄새가 모조리 다 기억난다.

영화 '최악의 하루'.
영화 '최악의 하루'.

영국 역사가 G. M. 트리벨리언은 ‘걷기’라는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나에게는 의사가 둘 있다.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 말이다.” 내 의사들은 이제 더 이상 장시간의 음주 보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술을 먹지 않은 상태에서도 서너 시간 동안 걷는 일은 거의 없다. 대신 가까운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일은 잦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 머리가 꽉 막혔을 때, 무조건 걷는다. 걷다 보면 생각의 실마리가 풀려난다. 걷는 영화를 볼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에서 누군가 걷는 장면을 보면 마치 내가 걷고 있는 것 같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최악의 하루’와 ‘경주’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걸음에 대한 영화들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오랫동안 걷는다.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걷는 동안 생각하고, 이동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두 주인공 혜정(김새벽)과 유스케(이와세 료)는 일본 고조시의 좁은 골목을 걸으면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혜정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서 뭔가를 찾고 있어요.” 유스케가 뭘 찾는지 꼬치꼬치 캐묻자 귀찮다는 듯이 혜정은 이렇게 대꾸한다. “재료.” 카메라는 그 순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보여주지 않고 두 사람이 지나가버리고 난 후의 골목을 오랫동안 비춘다. 마치 그 속에 중요한 뭔가가 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최악의 하루’의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는 자신이 구상한 소설 이야기를 처음 만난 여자 은희(한예리)에게 들려준다. “이 길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평범해 보이던 영화가 그 순간부터 신비로워진다. 현실의 길이 모두 지워지고, 보이지 않던 길이 생겨난다. 그건 ‘이야기의 길’이고 ‘신비로운 길’이며 낮에는 잘 보이지 않는 환상의 길이다. 하루 종일 걷고 난 후에야 그 길은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 '경주'.
영화 '경주'.

‘경주’의 최현(박해일)은 경주를 배회한다. 경주는 죽음의 장소다. 사방에 능이 있으며, 삶과 죽음은 지척에 있다. 경주를 헤맨다는 것은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곳에 있다는 얘기다. 영화의 거의 끝부분에 이르렀을 때에야 최현은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자기 그림자를 본다. 그리고 갑자기 길이 아닌 곳으로 걸어간다. 영화가 불현듯 끝나고 나면, 백현진의 노래 ‘사랑’이 흘러나오는데 노랫말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 같기도 하다. “텅 빈 마음으로 텅 빈 방을 보네. 텅 빈 방 안에는 텅 빈 네가 있네.” 텅 빈 방에서 서로 바라보는 텅 빈 두 사람에게서, 이야기가, 처음부터 시작된다.

김중혁 소설가·B tv ‘영화당’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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